[랍스터]

敖번 국도/영화 2017. 7. 2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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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때,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떨 때에 사람은 죽어도 괜찮은 걸까. 죽어도 상관없는 때가 있긴 한 걸까.

반대로,

삶이라는 건 어떤 이유에서 지속하는 걸까. 이 삶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죽음이 두려운 걸까.


(내용 스포 있음)

먼 미래의 인간세상에서 짝이 없는 이들은 호텔로 끌려와 채 한 달여의 시간만을 부여받게 된다. 그 시간 안에 새로운 짝을 찾지 못하는 이는 죽음보다 못한, '동물로 변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많은 이가 죽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서로를 사냥한다. 한 사람을 사냥할 때마다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삶은 하루씩 늘어난다.


한편, 어떤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사랑에 빠진다. 커플이 되어 도시로 다시 돌아가려면 호텔 방에서, 또 요트에서 진정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 만약 거짓으로 사랑에 빠진 척을 한 것이 들통나면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희귀한 동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서로를 속이는 이는 모두 남성이다. 이들은 목표로 삼은 여성을 유심히 관찰한 뒤, 그 여성이 자신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말과 표정, 행동을 꾸며낸다. 여성은 그들의 꾸민 행동에 속아넘어가기도 하지만, 차츰 남자를 의심하고, 결국 진실을 깨닫고 분노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거짓으로 사랑에 빠진 척을 했다가 잔인한 상대방 여자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만다. 그 대가로 여자는 개로 변한 그의 형을 잔인하게 때려 죽였다. 주인공은 호텔 여직원의 도움을 받아 숲 속에 숨어사는 '솔로족'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 곳의 생활은 호텔에서의 생활과 정 반대다. 그들은 짝을 짓는 걸 엄격하게 금지한다. 짝을 지은 자들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죽음을 언제나 준비한다. 모두가 자신의 무덤을 파놓았다가, 죽음의 위협에 맞닥뜨리면 스스로 자신이 파 놓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대범한 듯하지만, 사실 이들도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서로에게 서로의 무덤을 인식시키고, 결국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는 자기 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에 채여 들어가게 된다.

죽을 준비가 된 척, 사랑에 빠지지 않은 척을 하는 이들은 사랑에 빠진 척을 하는 호텔의 사람들과 결국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사랑에 빠질 수 없었던,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사랑 없는 삶은 곧 죽음이었지만,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포기한 척, 죽음을 받아들인 척을 한 것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장면은 이들이 호텔을 습격해서 커플들로 하여금 결국 사랑이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실토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더라도, 내 손으로 그 사람을 죽이게 되더라도, 내 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드러내보이고야 만다. 그렇지만 실상 아무도 죽지 않는다.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사랑에 빠지지 못한 자신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증거였으나, 결국 드러난 것은 자기 자신도 두려워하고 있는 죽음의 얼굴, 그리고 삶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무엇때문에 삶의 끈을 놓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는 걸까.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지금의 이 삶을 늘려보겠다는,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하지 않겠다는 그 집착은 왜 생기는 걸까.


호텔에 있던 한 여성은 평생동안 믿어왔던 우정을 사랑에 배신당한 뒤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날 영화 'stand by me'를 보겠다고 한다. 이 영화는 네 명의 어린 소년들 사이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마지막 장면이 "I never had any friends later on like the ones I had when I was twelve. Jesus, does anyone?"이라는 대사로 끝난다고 한다.

이 여성에게는 어쩌면 12살에나 얻을 수 있었던 그런 진심어린 우정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죽음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것이었던 듯 하다. 그녀에게는 사랑을 찾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언제나 함께했던 친구만으로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 우정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려고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해진 시간동안 인생을 살면서, 매 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후추 같은 것이었을 뿐일 거다.


삶에 대한 집착은 후추가루 몇 알이 부족한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삶에의 '집착'을 덜어주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소소한 행복'인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짝을 짓는 것'처럼 삶의 목표나 목적이 달성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이게 죽음을 당장 맞이한다는 말은 아니다. 삶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끊임없이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그러다보면 죽음의 눈길을 더 끌게 될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적당한 때,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다. 두려워할 것도 아니다. 동물로 변해버리는 이 영화 속 사람들처럼, 죽음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일 수 있다. 우리가 삶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덤덤하게 자신의 친구와 우정을 떠올리며 조랑말로 변한 그 여성처럼 살아야 한다. 죽음을 기다리지도, 그렇다고 늘 떠올리며 두려워하지도 말며. 덤덤하게. 후추를 몇 번 뿌리는 걸 잊지 말고.

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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