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트레일러를 봤을 때 [베스트 오퍼]를 떠올렸다. 예술작품을 다룬 영화여서 그랬을 것이지만, 두 영화는 음악감독이 유명하다는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사회에 당첨되어 서울극장에서 [베스트 오퍼]를 봤는데, 웅장한 음악 덕에 영화관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던 기억 때문에 이 영화도 꼭 영화관에서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쉽게도 대전에는 상영이 많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일요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40분 넘게 타고 달려-심지어 가다가 길도 잃어버렸다!- 조조 영화를 보고 왔다. 결과는 대만족.


이 영화는 한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던 세계적인 명화, 클림트의 '레이디 인 골드'가 개인의 소유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유명한 그림,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나치 치하에서 친구와 가족, 조국,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잃어버리길 강요당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림을 돌려받기까지의 법적 과정 자체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말과 표정, 작은 행동들을 통해 주인공들이 그림을 찾아오고자 했던 진짜 이유, 싸움에서 이길 거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두 사람이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든 마음을 보여준 것이 이 영화를 진정 아름답게 만드는 요인이다.


영화에서 랜디는 자신의 가족, 가문에 대해 무관심하며 그저 평범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보통의 사람으로 나온다. 하지만, 마리아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홀로코스트를 방문한 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깨어난다. 랜디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며 때를 기다리던 '뿌리'가 살아난 것이다. 그가 화장실로 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얼마 전 캐나다 교포 2세인 친구와 DMZ 투어에 대해 얘기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름대로 마냥 국수적이지 않으면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다소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인데, 스스로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무리 책이나 영상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교육을 받는다 해도 피부에 직접 와닿게 느낄 수는 없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DMZ 가 의미있는 건 그 현장에서만 느껴지는 긴장감,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분단된 국가라는 현실을 온 몸의 피부로 느껴볼 수 있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 어렴풋한 '느낌'을 갖는 건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내 나라와 뿌리, 미래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태도는 머리가 아닌 온 몸, 피부의 촉각 하나하나를 통해 느껴야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절대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오감을 곤두세우고 놓치는 것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기념물을 보며 '대단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DMZ가 의미있는 까닭과 마찬가지다. 그 기념물은 과거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을 생생한 감각으로, 온 몸의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포트키(Port-Key)인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다녀온 뒤 아내에게 사실 돈을 바라고 그 일을 시작했다고 털어놓는 랜디가 그 시간 이후로 자기도 모르게 그림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실감나게 와 닿는다. 로펌의 보스는 그에게 그런 '느낌'을 가지라고 월급을 준 게 아니라며 경고하는데(I haven't paid you to have such feelings!), 그의 의도는 랜디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느낌feeling은 돈을 주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맞는 말을 한 게 된 듯하다. 랜디가 돈을 주고도 절대 얻을 수 없는 그 '느낌'을 얻었기 때문에 그림은 제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 이 영화의 결말은 결코 운이 좋았다거나 '욕심쟁이 국가에 대해 따뜻한 마음의 개인이 승리했다'는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화이기도 한 이 결말은 사실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마리아에게 그 그림은 나치를 피해 조국과 가족을 모두 버리고 이국땅으로 도망치기 전까지의 시간. 지금은 절대 다시 찾을 수도 없고,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그녀의 삶에 대한 기억이다. 오스트리아에 다시 돌아가는 건 물론이고,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던 마리아는 아델레의 초상화를 돌려받기로 결정된 뒤 온전하게 과거의 기억을 바라보게 되고, "우릴 기억해달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린다. 랜디가 홀로코스트를 방문한 뒤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뿌리를 느끼게 되었듯 마리아도 항상 듣고 있었지만 듣지 못한 척 지내왔던 그 목소리와 이제 편안한 얼굴로 마주하게 된 순간이다. 영화는 아델레 숙모의 슬픈 눈을 통해, 마리아가 보여준 환한 미소를 통해 그 뿌리를 기억하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다.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의미있는 이해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뿌리의 말을 듣고 그 말을, 그리고 뿌리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된다. 의무라고 필자는 말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동안 그 뿌리를 감각하지 못하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에도 뿌리는 항상 말을 걸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랜디와 마리아, 랜디의 가족과 마리아의 가족 모두처럼, 그럼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sollea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