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이 작가의 <농담>https://solleap.tistory.com/403, <무의미의 축제>https://solleap.tistory.com/754를 읽은 적 있다. 그 두 권 다 읽으면서 이 작가는 너무너무 진지한 사람인데, 그 진지함에 대해서 항상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작가는 진지함은 쓸데없고 의미 없다고 외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진지함이 부각되는 사람 같다.
연애 관계로 서로 얽혀있는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은 셀 수 없이 많은 사건과 변화로 가득하고 그로 인해 인생의 무게는 살아갈수록 더욱 무거워지고 진지해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복잡하고 무거워지는 것이 '좋지 않은(부정적인)' 방향이며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이 살면 살수록 더 복잡하고 무거워지는 건 필연적인 것 같은데, 작가/서술자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인생과 같이, 시간과 함께 지나가버리는 건 모두 일회적인 것들이다. 이런 것은 지나가면 그만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곱씹어 생각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무시하고, 우리 대부분은 인생의 모든 일, 내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과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곱씹으면서 무겁게 만들어 현실을 등지고 삶을 '망치고' 있는 거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복잡성과 무거운 존재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고, 그러한 무게가 중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려고 애써도, 알고 보면다 의미없고, 깃털처럼 가볍고 먼지처럼 쉽게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 결국 내 옆엔 너만 남게 될 것- 아무리 새로운 사람과 사랑, 인생을 찾아다녀도 내 옆엔 나와 내 인생, 내가 이 세상에 나면서 부여받고 손에 움켜쥐게 된 그것만이 남을 거라는 거다.
정확히 그렇진 않지만 거의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챕터의 제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 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우리가 청-장년기에는 인생에 변화가 너무 많아 폭풍 속을 지나는 듯하며,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내 인생뿐 아니라 이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때를 지나 노년기, 인생의 끝에 다다르면 결국 처음-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과 다를 건 아무것도 없고 나라는 존재도 너무나 미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걸 챕터 제목으로 대놓고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이렇게 집착적으로 회고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심은 '자아'의 발견에 대한 본능적인 목표의식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자아라는 건 내가 노력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인간은 사실 다 똑같다는 것. 내가 타인과 다른 "'자아'의 유일성"은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회고하고 노력하여 내 자아를 만들거나 찾고 인생을 가꿔나가는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다름을 쟁취해내야 하는 것이 자아이므로 애초부터 우리가 살아오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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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포착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히틀러와 아인슈타인 사이나, 브레즈네프와 솔제니친 사이에는 차이점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소련의 침략으로 동일성, 획일성같은 것만이 강요되었고 개인의 별 의미 없는 의견이 사실은 가장 사악하고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오히려 동일성을 잊게 되고 자꾸만 나의 다름, 나의 의지에 집중하게 된다. 그 안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결국 얼마나 이 모든 게, 내 인생이, 감정이, 사상이, 목표가 다 가볍고 흩날리기 쉬운 것인지 작가는 자꾸만 생각하고 얘기하고 그로 인해 슬퍼했던 것 같다.
어떤 장면에서는 영화 <타인의 삶>이 조금 떠오르기도 했다. 체코가 소련에게 점령당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았다면 좀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모든 사람은 거의 다 똑같고, 변하지 않는데 단 한 가지 정도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점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나 또한 저렇게 변하고 싶다, 와 같은 엄청나게 큰 착각, 변화에의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다. 후자가 아마도 프란츠의 모습일 것이다. 전자는 아마도 토마시일 것이다. 이 둘, 그리고 사비나와 테레자 또는 마리클로드 중 누구의 삶의 태도가 낫고 옳은지를 묻는 것도 의미 없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 똑같으나 단 한 가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그들의 사상, 가치관 이런 것들 모두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현재를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느냐, 행복을 느끼느냐를 따져보면 모두 다 똑같이 별로일 테다.
그런 점에서 현재만을 살아가는, '시계' 그 자체인 카레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현명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암에 걸려서도, 반복적인 하루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개체. 깊이 고민하거나 변화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집착하지 않는 존재. 밀란 쿤데라 스스로가 이러기를 너무나도 원했으나 자신도 그리고 세상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자꾸만 그런 생각 - 인생은 일회적인 일의 연속이므로 너무나도 가볍고 모두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데에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번엔 한밤중에 갑자기 의식을 되찾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먼 곳에서 돌아왔는지 누가 알까! 어떤 유령을 만났는지 누가 알까! 그리고 지금 자기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가장 가까운 존재를 알아보고는 자기의 끔찍한 희열,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태어나며 느끼는 희열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체코에서 사용하는 공식 언어는 체코어다. 동유럽국가의 언어에 대해서나 언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어떤지 모르겠다만 러시아어와 비슷한 느낌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웹에 검색해 보면, 5-60년대 또는 그 이전에 태어난 세대에 해당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데, 어르신 중에서는 독일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소설 안에서도 독일어를 비롯한 체코어 외의 외국어들이 등장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렇게 다른 언어가 섞여있을 때 그 함의나 분위기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굉장히 간결한데, 또 직설적이지는 않아서 어느 언어로 쓰였느냐, 그리고 어떤 단어가 어떤 문장 속에서 쓰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주기도 하는 것 같다. 다른 역자가 옮긴 걸 읽어보고 싶어서 두 권을 빌렸는데 알고보니 표지만 교체된 버전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