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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회는 여기뿐이니까.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종류의 사회에서도 결국 다 마찬가지 아닐까?(너무 당연하게도?!)

하이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었다.
그리고 나는 직접 겪어보지 않았지만,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높은 의자에 앉아 뾰족한 발톱으로 의자 아래 모든 것들을 할퀴었다는, 어떤 성격 나쁜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무서운 고양이까지는 만나지 못했지만 무섭게 노려보던 고양이, 낮은 소리로 끝없이 으르렁대던 개는 봤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아직까지 아프다.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사람은 그 지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특히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먼저 알려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 사람이 전달하는 '지식'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한지와 그가 자신이 가진 그 아름답고 유용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준비가 되었는지(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을 포함하여)는 별개의 문제다. 그 사람이 가진 게 그것(지식)뿐이라면 그 사람은 '나홀로 연구'를 해야 한다.

특히 과학기술인들은 '지식인'으로서 수많은 사람들(흔히 말하는 '대중') 앞에 설 기회가 많다.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목소리를 쓰기도 하고 활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정말 수많은 통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전달하는 것은 지식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에 강의를 통해서는 전달되지 않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강의를 듣거나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그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다거나 '존경한다'고 한다면, 여기서 무엇을 존경하고 무엇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자.
그들의 '지식 수준'을? 아니면 그들의 '말솜씨'를? 나는 잘 모르겠다.

어린이의 푸념을 푸념으로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짜, 그리고 가장 솔직한 목소리다. 그들은 '사람됨'에 감동하고 상처입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물론 나이가 어린 진짜 어린이, 아이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이 가장 잘 안다.

진짜 선생님이란 자기보다 낮은 이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진정한 가르침이란 내가 아는 것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부끄럼 없이 털어놓는 것이다.
꼭 선생님이 아니라 동료로서도, 누군가를 이끌고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줘야 할 일은 의외로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내가 무얼 '가르칠까'보다 '배울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앨리스는 크로켓 경기장 허공에 체셔고양이가 나타날 때 이런 말을 한다. "귀가 나타나기 전엔 아무 말도 듣지 못할 거야"라고. 그녀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말하기 전에 체셔고양이가 무슨 말을 할지 들을 준비를 먼저 한 거다. 체셔 고양이가 '들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한 거다.

16.10.7 23:13

+ 솔직히 그때 쓴 글들이 더 읽기 좋은 것 같다.

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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