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敖번 국도/영화 2024. 12. 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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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베이커는 매번 영화를 통해 이게 진짜 현실이야,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 영화를 보는 게 답은 아니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션 베이커가 보여주는 풍경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나온 모텔, <아노라>의 '헤드쿼터스', 코니아일랜드, 라스베가스. 배경뿐 아니라 인물도 그렇다.
여기 내가 진짜 션베이커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기존의 모습을 전혀 부정하거나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와 반대되는-대체로 더럽거나 가난한 느낌을 아주 성공적으로 준다는 것이다. 생생한 색감과 구조의 배경과 대부분 금발 백인에 예쁜 옷을 입은 사람들. 분명 예쁘고 따뜻한 곳이고, 우리가 보는 주인공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 어울린다. 이런 느낌을 받는 데는 그들의 외모보다 그들에게 아무나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처음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줄 알았는데 곧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사람들. 나 좀 보라고, 내 말 좀 들으라고 발버둥치고 소리치기까지 해도 소용없는 사람들.

<아노라>의 코니아일랜드는 실제 장소가 아니라 션베이커가 창조해낸 곳 같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코니아일랜드는 이런 사람들의 배경일 뿐이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는 밤, 택시비 몇 달러 아끼겟다고(물론 몇 달러는 아니겠지만 네 명이잖아!) 나무데크 위를 끊임없이 걸어가는 덩치큰 아저씨 셋과 예쁜 여자(네 사람이라고!). 정말 약에 취한 바보인건지, 깡패같은 애들한테 당하고 있는 약자인건지 모르겠는 사탕가게 주인 아저씨. 가판대 너머에서 맘대로 과자를 집어먹고 장사따위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불량하게 서있는 애들. 코니아일랜드라면 <원더 휠>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에게 코니아일랜드는 이럴 곳이,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다닐 곳이 아니었다.
클럽 이름이 '헤드쿼터스'인 것도 재미있는데, 이런 클럽의 뒷방들이 결국 뉴욕을 좌지우지하는 헤드쿼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네 생각이고, 바람일 뿐'이었나보다. 싶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장소들은 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듯하다. 믿을 수 있는 건 땅에 디딘 두 발, 찬바람에 빨개진 두 뺨, 나와 너의 육체 뿐이다.

아노라는 반야를 사랑했을까? 그는 단순히 억만장자와 법률상이라도 결혼에 성공해서 인생역전을 하고자 했던 게 아니다. 그가 가장 바란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진짜 사랑'이다. 어떻게든 돈이나 더 받아내고 말 생각이었다면 아노라의 태도는 처음부터 많이 달랐어야 하고, 그럴 수 있었다. 아노라에게 가장 소중한 건 아노라, 예쁜 아노라, 사랑 받는 아노라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뜨끈한 심장.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은 돌아올, 또는 그 자리에 있을 감정과 마음이다. 하지만 이 사단을 만들어내는 건 현실이다. 배경과 육체, 이 모든 물질적인 조건들 역시 곧 사라질 환상같지만, 사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내 등 뒤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노라의 행동은 너 정말 나 사랑해? 라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육체를 매개로 사랑한 것은 아닌지, 이고르의 뺨을 때리며 물을 수도 있었을 질문이었다. 이고르가 아무리 착한 사람인 것처럼 그려져도, 그건 아노라가 생각하는 '사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노라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처럼 자기를 사랑해줄 수 있는지 묻는 행위이다. 그런 식으로밖에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울고, 또 이고르의 대답이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에 울었다고 생각한다.

아노라의 눈물, 곧 사라져버리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그 눈물은 펑펑 내리는 하얀 눈에 가려 이고르밖엔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질문과 대답으로써의 눈물은 아노라의 예쁜 외모와 반야의 멋진 집이라는 보여지는 것 이면의 진실한 사랑, 순수한 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모든 고전 동화가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고 끝날 때는 배경의 전환을 동반한다. 더럽혀지고 상처받는 걸 피할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아서 더 괴롭고 슬픈 이 '사랑',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같은 것들은, 결국 물질적인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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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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