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기억하기 위해 남긴 키워드: 광화문, 담배, 알고 보면 다 별 거 아닌.
그리고 문장은, ‘한형일의 기타를 듣기 좋은, 너무 이른 초봄’.
빨강, 초록, 파랑으로 변하는 PPT 슬라이드 같은 컷에 아 이거 옴니버스 단편영화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짧은 영화이긴 한데, 정말로 더 짧게 느껴져버린다. 이 컷들 때문에.
괜히 아쉬운 소릴 해보자면, 왜 길게 하나로 이어지는 장편을 만들기는 어려울까? <최악의 하루>같이 하루를 그리는 영화도 있는데. 라고 투덜거려본다.
등장하는 두 사람이 과거에 연인 관계였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남성과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정하게 되는 뻔한 생각은 아닐런지. 그도 그녀도 결국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기도 했으니까 더욱 그렇다. 남자와 여자, 라고 하면 연인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썸 같은 관계를 기대하기만 하지 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확장해서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광고용 팸플릿에 박혀 있는 여러 가지 평 중에 ‘비포 시리즈에 보내는 답가’라는 문구도 있었는데, 영화를 보기 전엔 그 문구 때문에 기대를 했지만,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과연?’이었다. 두 남녀의, 세 가지 시간에서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밖에 나는 유사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본 날 낮에 광화문에 다녀와서였는지도 모르겠으나, 광화문에서 서울극장(지금은 서울아트시네마) 사이를 잇는 그 청계천가라는 배경 자체에 나는 관심이 더 많이 갔다. 인물이나 대사보다도 배경 자체에 관심이 갔다는 건, 아쉽지만 인물의 매력이 쪼금 부족했던 건 아닐까(비포시리즈와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두 인물의 이름이 안 나왔던가.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나왔던 것만 같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시네토크 장면에서 화면에 나온다. 물론 나는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만큼 나는 이 영화에서 인물의 무게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인물의 무게를 아주 무겁게 느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고, 어떠하며 어떨 것인지에 더 많이 집중했던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고, 또 광화문 근방에 많이 다녔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 궁금했다. 토론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면 외국인들이 많이 봤을 텐데, 이미 광화문광장과 이순신 동상이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이나 에펠탑, 세느강처럼 어떤 상징적인 관광지가 되어버린 건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였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내게 인물보다 장소, 배경이 굉장한 역할을 하는 영화였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가 닿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광화문뿐 아니라, 서울극장과 청계천가를 지나는 버스에 대해서도 나는 추억이 있다. 이십대에 시사회나 예매권 이벤트에 응모를 많이 해서 영화를 한참 보러 다닌 탓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운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서울극장이 없어진 건 사실이고 영화에서도 이 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시네토크가 주요 사건인데, 나 역시 이곳에서 정말 좋았던 영화 시사회를 본 기억이 있어 마음이 이상했다. 서울극장뿐 아니라, 올해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도 다시 떠올랐고. 마침 두 번째 미망(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에서, 인물들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청계천에는 연등이 매달려있는데 나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이 매달려있던 즈음에 버스를 타고 청계천을 지났던 일이 있어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나에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배경이 엄청나게 많은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사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크게 중요하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이러한 생각 – 인물간의 관계나 그들이 하는 말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건 더 굳혀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손님이 타지 않은(남자 주인공이 내려버린) 버스가 계속해서 운행하고, 장기하의 노래가 나온다. 마치 이 노래 가사가 이 영화를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알고 보면 다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왼손잡이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만 오른손에 칼집을 들고 있든, 그게 왜이든, 동상이 이전을 할 것이든 말든, 내가 배우자는 없지만 아이가 있든 말든, 나와 네가 이전에 어떤 관계였든, 다 별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12시와 12시), 그게 같은 12시인지 다른 12시인지 알 수 없고, 왠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장기하의 노래 <별거 아니라고>가 나오는 게 아주 좋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미망: 작은 바람” 은 왜 나온 것이었을까.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별 게 아니길 바라는, 그런 우리의 바람을 겹쳐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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