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쓰다 날라가버렸다. 다시 쓰려니 기운이 빠진다.
요즘 충정로의 한 공간에서는 유명했고, 인기있었고, 또 의미 있다고 평가받는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보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회차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주 한 회를 다같이 감상하고, 또 그 회차의 주제와 관련된 전문가가 와서 강연도 한다. 심지어 공짜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개인적으로 구해서 보려고 해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공짜이니 정말 좋은 기회다.
그 첫 번째 시간에 함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언니오빠 셋과 함께 가봤다.
이렇게 개방적인 행사를 연다는 게 참 기뻤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심지어 초등학생부터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까지!- 세 시간이 넘는 행사 내내 서있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그 다큐를 전부는 아니고, 일부 본 적이 있어서 다큐 자체는 별 대단한 감흥이 없었다. 함께 간 이들 중, 책에서 중요하게 짚고 있는 내용이 다큐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 같고, 과학적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다큐는 몇십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뒤 리메이크 된 버전으로, 과학적 깊이는 조금 얕아졌지만, 대중들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데는 동의했다.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낮아져서 누구나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문제는 전문가 강연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가지는 의미, 우리에게 주는 큰 메시지 같은 것을 얘기해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1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초청된 전문가는 분명 지식적으로도 뛰어나고,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와도 연관이 있는 분이 맞았다. 그런데 그의 강연은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았고, 그 날 함께 감상한 1회의 내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깊이 접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분은 자신의 인생 역경, 자신이 얼마나 우주와 별의 비밀에 대해 미쳐있었는지를 얘기하시는 데 100분여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이 분은 강의 초반에 '남학생들은 천문학, 여학생들은 생물'을 선택했다는 언제적인지 모를 때의 이야기까지 하셔서 나를 경악하게 했다.
물리학자이신 아버지가 '여자애들은 외우는 생물이나 하지'라는 말씀을 하셔서 거기에 질려버린, 지금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주 똑똑한 후배 생각이 났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모두 이 분의 강연이 무슨 주제를 가지고 흘러갔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주제도 없고 조리도 없이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흘러갔을 뿐이었다. 다큐시리즈의 내용과는 점점 멀어졌고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 강연이 '감동적'이었고, 그 분의 이야기가 '진중하고' 좋았다는 평만 내놓았다. 다음 시간에 절대 가지 않겠다는 우리와 달리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칼퇴근하고 여기로 달려오겠다는 이야기 일색이었다.
나는 그 분의 강연을 들으면서, 당신은 우주와 별에 미쳐있었던 멋진 과학자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당신과 달리 우주와 별에 미쳐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왜 우주에 대해 별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걸까,를 묻고 싶었다. 대중 누구나를 위한 강연이라면 이런 '의미'에 대한 전문가의 깊은 고민을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건 나의 욕심이었던 걸까?
난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 일색인 반응을 보며, 저 사람들이 정말 이 다큐와 강연의 내용을 이해한 걸까 걱정스러웠다. 내용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는 전혀 않고 '나는 그 날 여기 갔어', '난 이거 봤어', '난 그 사람 강연 들었어' 이걸로 끝날 것이라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물원에 가서 나는 홍학을 봤어! 라고 하고는, 그런데 홍학은 왜 홍학이야? 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이 있으면 본다. 귀가 있으면 듣는다. 다리가 있으면 누구나 어느 장소에 갈 수 있다. 그 뿐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생각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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