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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음에서 기인하는 존재. 말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소음.

 

황정은의 소설은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가 충분히 사유하지 않는 것들의 중요를 보여준다.

늘 반복되던 일상의 패턴 속에서 살해당한 dd. 물리적으로 세상을 떠난 건 dd인데, 실제로 죽음 속에 살게 된 것은 d다. 여기서 d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매번 생생하게 살아나는 고통이나 죄책감같은 감각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dd의 죽음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dd의 죽음을 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그 죽음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감각할 수 없고, 그 결과 죽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자극을 원하며 이전과 같은 것, 그 자리에 늘 있는 것은 새로이 돌아보거나 감각하려하지 않는다. 이 모습은 <아무것도 말 할 필요가 없다>에서 반복되어 보여진다. 한 발 더 나아가 언어를 통해서 지적되고도 있다. 제목과 같이 "아무것도 말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은 사실 그 어떤 것보다 더 말해지고 감각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돌아보지 않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게으르고 자만한 태도이며, 말해지지 않는 그 대상에서 반사되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넣는다.

 

"기회가 있었다는 이유로" 무언가가 되어놓고는, 그것이 뭔가 대단한 능력이나 권위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어진다.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아무것도 말 할 필요가 없다>의 화자는 이 모든 오만함, 사유불능 상태에 대한 관찰자이지만, d는 그 대상 자체이다.

d는 dd의 죽음을 감각한 순간 드디어 삶으로 돌아온다. 사물의 미지근한 온기에서 진공관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는 것으로 그의 감각-인지-사유의 대상이 변화하면서 d는 죽음에서 삶으로 걸어나온다. 생각하지 않고 있던 면을 감각하게 된 순간. 삶으로 걸어나오는 순간이다. d의 감각이 변화하는 과정처럼 우리 모두 일상에서 '생각하지 않는 면'에 좀 더 마음을 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엔 모두 게으르고 오만하기만 한, 감각을 잃은 채 죽어 움직이는 생물이 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완전히 다른 두 편의 소설같지만, 여기 실린 두 편의 소설 <d>와 <아무것도 말 할 필요가 없다>은 그 시공간이 겹쳐지는, 분리되지 않는 이야기다. 작가가 한 장소에 서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다. 같은 시간, 늘 거기에 존재하는 곳을 지나며 완전히 다른 두 이야기가 발생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잊고 있던 감각이 갑작스레 느껴진다. 바로 내가 사유불능의 상태에 있었다는 감각이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특이한 점은, 화자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성을 붙여 그대로 부름으로써 성별에 대한 감각을 처음부터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은 글이 등장인물-그것이 사람이라면 더욱더, 매우-의 성별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감각시키는 데 반해 이 두 편의 소설에서는 어느 누구의 성별도 처음부터 쉽게 감각되지 않았다. (중성적임이 아닌, 이성의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작명까지 더해져있으니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느껴졌다). 이 역시 우리가 평소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덮어두었던, 생각하지 않는 면들을 감각하도록 촉구하는 장치같다.

 

쉽게 감정적이 되고 표면적으로만 반응하기 쉬운 사회문제를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이나 목소리 큰 자들의 시선에 쉽게 압도당하기 쉬운 세상에서, 주위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들을 스스로 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바로 '산' 상태로 살아가는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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