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슨과 크릭.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로 십대시절 교과서에서부터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이름이다. 이 책은 제임스 왓슨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을 개인적인 감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과학사나 연구 기록이라기보다 일종의 일기같아 금세 읽힌다.
사실 생물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좀 더 과학적인 접근 방식, 연구자의 태도같은 것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일상적인 글의 내용과 말투에 약간 놀라기까지 했다. 과학적 사실이나 연구 방법같은 데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이고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으며, 인류와 생명의 비밀을 풀어낸 사람들도 내 주위 사람과 별반 다를 데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쉬이 들 정도로 일상적인 내용이 많다.
나를 놀라게 한 점은, 이렇게 '위대한 발견'을 했다는 과학자가 쓴 내용이 겨우 이 정도라거나, 너무 일상적이다,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왓슨의 연구에 대한 태도였다. 그렇게 위대한 사실을 밝혀내게 된 과정에서 너무 우연적이고, 수작업에 기반한 노동의 요소가 많이 보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는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가 연구실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관심을 둔 연구 주제를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며 흥미가 이끄는대로 연구를 했다. 물론 이 책에 충분히 담기지 않았을 뿐, 제임스 왓슨은 많은 진지한 연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만 보자면, 그는 그의 학위와 연구 경력에 남을 주요한 주제에 대해서뿐 아니라, DNA의 구조 역시 단순히 흥미에 이끌려서 연구했다. 그의 DNA 구조 연구에 대한 흥미는 폴링에 대한 아주 약간의 경쟁심, 인류사에 남을 엄청난 발견이 될 거라는 눈치로부터 출발했으며, 크릭, 윌킨스, 프랭클린의 연구 결과를 접하고 또 그들과 논의할 수 있었다는 환경적인 기회의 뒷받침을 받았다. 특히 DNA의 구조를 밝혀내겠다는 열망은 왓슨보다 크릭이 더 강하게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질적으로 그 구조를 증거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프랭클린과 샤가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왓슨은 기초적인 지식이 굉장히 부족한 상태에서 크릭을 비롯한 많은 다른 연구자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수작업에 기반해 DNA의 구조를 밝혀나갔던 것으로 읽힌다. 사실은 이게 더 놀라운 점이긴 하다. 어떻게 화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조언만을 받아 결국 DNA의 구조를 밝혀냈을까,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인류에 남을 업적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잠시 들었다. 어쩌면 과학이라는 건, 우연과 타이밍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연과 타이밍만으로 위대한 발견을 해낼 수 있었던 건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은 그 시대의 이야기일 뿐인 것 같았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때에 학생들끼리 종종 '찍으면 나오는, 새로운 발견은 이제 모두 끝났어' 라고들 말하곤 했으니까.
위대한 발견을 만드는 것은 우연과 타이밍이 아니었다. 엄청난 사명감이나 대단한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있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고, 즐거운 파티에 가서 예쁜 아가씨들을 만나는 일상이 중요했던 왓슨과, 매일 느지막한 시간에야 연구실에 나오고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모르는 크릭에게 위대한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 가지 자질이었다.
순수한 흥미에서 비롯된 질문에 대한 답을 끝까지 찾아가려는 태도와 고도의 집중이나 대단한 자원의 투입이 없더라도, 여러 가지 작은 조각-그것이 지식들이든, 사람들이든-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아무리 평범하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었더라도 위대한 발견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지금도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순수한 흥미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는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떤 사실을 발견해내는 과정 자체도 오래 걸리지만, 그것이 옳은지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와 지구력이 필요하다. 이 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직 '순수한 흥미'뿐이다.
순수한 흥미보다 중요한 것이 두 번째 부분이다. 과학 지식들이 더 복잡하고 세분화되어 빠르게 많이 쏟아지는 지금, 지식의 조각들을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은 어느때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연구 결과에 대해 연구자가 제시한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안목, 또 자신이 생각한 바를 다른 연구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왓슨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두 가지 태도는 지금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왓슨의 글에 녹아난 그 당시 과학자 사회에서도 하나의 배울 점이 있다. 그 시대의 과학자들은 서로의 발견을 함부로 욕심내지 않고, 예의를 갖춰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으며, 사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칭찬했다는 점이다. 왓슨과 크릭이 논문을 제대로 완성하여 투고하기 전에 다른 과학자들에게 DNA 모형을 보여주었던 것은, 물론 검증을 필요로했던 것도 이유이지만 지금이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경쟁관계에 놓여있고, 검증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읽으려면 얼마든지 가볍게 읽어낼 수 있는 글이고, 한 미국 과학자의 영국 연구실 생활기 정도로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는 책이지만-물론 결론이 너무나도 위대한 발견이어서 재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임스 왓슨 자신과 그 주변 과학자들의 연구 태도,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소소하게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敖번 국도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디의 우산] 황정은 (0) | 2020.07.01 |
---|---|
[아무튼, 양말] 구달 - 트레바리 2007 / 나알기-초록 (0) | 2020.06.24 |
보스토크 12 <모두의 혼자 Alone> / 트레바리 2005 - 찰칵 (0) | 2020.05.17 |
[에이트] 이지성 (0) | 2020.05.11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0) | 2020.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