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연애를 계약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계약같은 관계가 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그만두곤 했다. 계약서의 존재는 이해관계-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에 놓여있는 두 사람이 서로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연애를 시작할 때 거의 항상, 상대방과 내가 서로가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이상적인 전제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혹은 그 반대로, 상대와 내가 서로 바라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연애를 시작했거나). 관계가 계약같아졌다고 혹은 계약이 필요한 관계라고 느끼게 된 그때에서야 나는 상대와 내가 서로의 바라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내가 그 동안 완전한 착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건, 정말 처음부터 서로를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오랫동안 착각에 빠져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혹은 더욱 더 서로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앞의 경우라면, 그럼 이제부터 정말 서로에게 서로를 명확히 알려주기 위해 노력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의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 하지만 두 번째 경우라면 상황이 아주 다르다. 이런 관계는 재빨리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면 시작하는 단계부터 계약서를 써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른다는 것이 맹점. 계약서를 쓰는 것 자체보다도, 계약서를 쓸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중요한 건 계약서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 자신 역시 충분히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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