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에게로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내게 세상으로 발산하는 어떤 힘,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도와주고 싶도록 하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좋은 일이 내가 그런 일을 원치 않을 때에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걱정하는 것이다. 걱정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고 가두며, 우리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들을 끌어당긴다. 그때의 우리는 자석과 같다.
어제 미사를 드리면서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사시간에 얼마나 딴생각에 빠져 있는지..)
꼭 지나고 나면 그 일에 대해 이유나 의미를 갖다붙였다. 지나고 나서야, 아 그래도 그 때 그렇게 되길 다행이지. 마치 꼭 그렇게 될 예정이었던 것 같다니까. 라며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행복해했다.
사실 이번 일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번 일이 생기게 된 것에 대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내가 직접 노를 저어 건너야 하는 큰 강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나고 나면, 그래 그 때 그 물살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주었지. 라고 생각할 걸 잘 알면서도.
노를 왼쪽으로 저어야 할까, 오른쪽으로 저어야 할까, 노를 쥘 땐 어느 부분을 잡는 게 유리할까 그런 걸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 생각은 마치 물처럼 나라는 배 안에 스멀스멀 차올랐고, 그 덕에 무거워진 배는 나아가지도 못하고, 나무판들은 조금씩 썩어갔다.
가볍게 노를 쥐고 강물이 나를 밀어주는대로 앉아있으면 되는 것을. 지나가는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하고 나는 소리쳐 울고 있었다. 부은 눈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마 전 영화 '위아영'을 봤다. 그건 무모하거나 바보같은 게 아니라, 그저 '젊은 것'뿐이라는 메시지. 내가 딱 그럴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는 것도 경험도 없는데 세상은 자꾸 날 부르는 것 같아 아무에게나 외치는 대답이었다. 예스 위아 영.
그렇다. 난 분명 팔십살이 되어서도 고개를 쳐들고 동그란 눈으로 당당히 말하던 이 시간을 후회하진 않을거다.
그렇다. 난 분명 이 순간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나 자신의 운 좋음에 행복해할거다.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이루어지게 할 것이고, 이루어질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 나와버렸지만, 이 말은 상투적이기만 할 뿐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 개신교 신자인 친구가 자주 하던 말인 '하느님이 예비하신 일'을 바라는 마음이랄까.
여전히 노를 움켜쥔 손을 가만 두지 못하는 나는 온 몸에 힘을 푸는 연습을 좀 더 많이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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