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할 예정이거나 한 사람에게 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물어봤다. 결혼을 하고 싶은지 여부와 별개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런 나에게 첫 번째 이야기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사계절을 겪어야 사람을 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버스에서 겨우 한 번 마주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게 다가 아니다. 우연히 말 한마디 했던 사람이 신문에 나를 찾는다는 문장을 남겨야 하고-물론 지역 신문이 그런 꼭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문장이 실린 판을 내가 우연히 봐야 한다!)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결혼이라는 장치 없이도 거의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두 사람이었을 거다. 운명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에 우연을 거쳐 만난 운명의 상대가 아니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처럼 사랑하며 사는 관계를 맺고 산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굳이 '결혼'이라는 걸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회 문화적 기반이 잘 갖춰져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걸 가지려는 노력이 어렵고 힘들기에 차라리 제도와 사회적 약속에 기대는 것은 아닐까 싶게 만들어 씁쓸했다. 차라리 네 번째 이야기가 마음은 가볍다. 그런 마음이 필요한지조차 몰랐던 걸로 보여서다.
그럼, 결혼은 왜 하는 걸까?
네 번째 이야기를 보면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이 이야기는 결혼이 왜 필요한 것일까,진정한 결혼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이는 어떤 관계일까, 라는 질문에 가장 가까운 답을 줬다. 싸움은 물론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는 사이,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 관계. 그건 사랑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관계는, 물론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반드시 서로를 궁금해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서 온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 사람이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내가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상대방이 '캐주얼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래, 그럼 몇 번 적당히 만나다 헤어지지 뭐'라고 생각하거나 상대를 설득해서 태도를 바꾸려고-좀 더 진지하고 적극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할 것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상태로 아이까지 낳아 기르며 수십년을 함께했다.
.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크다. 모든 감정 상태를 다 보여주는,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모두 알게 되는 관계를 맺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서로를 관찰하고 이해하지 않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알기는 절대 쉽지 않다. 특히나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려움이 각별했을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탓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걸 잘 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것도 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분명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것이 그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슬프지 않다.
애초에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온전히 이해되어야 할,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은 없는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누구도 하나의 모습으로 귀결되는 존재가 아니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대가 나를 알아가려는 태도,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가 관계-의 시작과 지속 모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누군가와 처음 관계를 맺을 때 내 모든 걸 보여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이건 내 노력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있는 내 모습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면 결혼과 관련해 문화적 사회적 차이가 느껴져 고민이 더 커진다. 언어적 장벽, 물리적 장벽, 문화적 장벽까지 있으며 서로에 대해 솔직히 얼마나 잘 알게 되었는지 의심되는 두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앞뒤 다 잘라먹고 그냥 '결혼'을 할 수 있는 걸까? 두 사람이 '결혼'을 하기로 선택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다르다는 사실보다 서로 다른 점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태도가 없어보이는 게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이 시트콤같고 모든 순간을 유쾌하게 웃어넘긴다,는 느낌으로 끝나는 글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중국(아시아로 확장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에서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나이가 어느 정도 든 남녀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여 함께 사는 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 서로 믿고 사랑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선이 되는 것 -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하지만 확정지어 결론내리고 싶지 않다)를 생각해보게 만들면서 첫 번째 글과 크게 대비됐다./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걸 가지려는 노력이 어렵고 힘들기에 차라리 제도와 사회적 약속에 기대는 것은 아닐까 싶게 만들어 씁쓸하다.
결혼을 할 예정이거나 한 사람에게 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물어봤다. 결혼을 하고 싶은지 여부와 별개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해하고 싶었다(하고 싶긴 하다). 이런 나에게 첫 번째 이야기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사계절을 겪어야 사람을 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버스에서 겨우 한 번 마주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게 다가 아니다. 우연히 말 한마디 했던 사람이 신문에 나를 찾는다는 문장을 남겨야 하고-물론 지역 신문이 그런 꼭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문장이 실린 판을 내가 우연히 봐야 한다!) 운명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 운명의 상대가 아니어도 수많은 사람이 이들처럼 행복하게 사랑하며 산다. 이들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보이는 건 둘이 얼마나 운명적인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어서다. 하지만, 굳이 '결혼'이라는 걸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회 문화적 기반이 잘 갖춰져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결혼은 왜 하는 걸까? 어떤 사람이라면 결혼이 하고 싶어지는 걸까?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배울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변하는 걸 잘 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것도 안다. 쉽지 않다는 게 분명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것이 그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슬프지 않다.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건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에 여전히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애초에 온전히 이해되어야 할,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없는지 모른다. 누구도 하나의 모습으로 귀결되는 존재가 아니며, 상대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대가 나를 알아가려는 태도,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가 관계-의 시작과 지속 모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인형극을 관람하듯 상대를 구경하는 태도가 아니다(네 번째 이야기에서처럼 말이다 - 그들은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한 듯하다). 인형을 조종하듯 상대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건 더욱 아니다. 그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내가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생긴다면 결혼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결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결혼은 결코 '인륜지대사'가 아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가 내게 씁쓸하게 다가온 이유다. 다르다는 사실보다 서로 다른 점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태도가 없어보이는 두 사람이 결혼을 선택한 이유는 전통적 사고, 제도와 사회적 약속에 기대어버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이 시트콤같고 모든 순간을 유쾌하게 웃어넘긴다,는 글의 마무리는 다분히 인위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결혼은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얻기 위한 부수적인 선택으로 두고 싶다(물론 꼭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그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사실 그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여도 괜찮을 만큼, 평생을 제일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싶은 사람을 알아보기를, 또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게 어렵고 힘든데다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사회적 약속이 더 급급한 목적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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