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느낌의 표지와 '다정한 서술자'라는 말랑말랑한 제목을 보고, 다정함에 대한 읽기 쉬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막상 책을 펼치고 보니 첫 장부터 읽기가 쉽지 않아서 스스로 '내 독해력 무슨일이야'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몇 장이 넘어가고 나자 오히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를 더 듣고 생각하고 싶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말까지 포함하면 총 열 세 편의 글이 실린 이 책은 독자의 마음을 깨우고 이 책(과 이 책을 쓴 올가 토카르추크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책과 저자들과 대화할 자세를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볍고 짧은 글만을 읽어왔고 시선이 얼마나 내 안에만 머물렀는지를 되돌아보게 됐다.
열 두 편의 글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글은 모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엔 마음 속에 하나의 분명한 심상이 남았다. 아마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사람이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중요한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이 어떤 글을 쓰고 무슨 말을 하든 거기에 녹아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심상은 바로 제목에도 쓰인 단어인 '다정함' 이었다. 내가 늘 살아오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 나라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 내 입과 손으로 쓴 이야기가 아닌 번역가를 통해 새로 태어난 말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며 올가 토카르추크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태도인 '다정함'에 대해 얘기한다. 세상은 결국 '관계'로 만들어져있고, 그 안에서 '낯섦'과 '다름'을 잘 인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온 세상이 더 가깝게 연결된 것 같은 요즘, 오히려 '낯섦'이나 '다름'에 대한 인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자기 안으로만 향해있고, 또 그 시선의 깊이나 길이도 얕고 짧다. 결국 다 '나'로밖에 보이지 않고, '나'라는 몸피만 하게 세상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다. 새로움도 다름도, '낯섦'같은 것도 세상엔 없고 너무나 익숙하고 뻔한 '나'만 남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똑같아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접목'과 새로운 탄생, 변형, "기벽"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실제로도 점점 축소될 수 밖에 없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축소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 같다.
강의록에서는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던 작업 과정에 대해서 굉장히 솔직하고 많은 얘기를 한다(<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스포일러가 있었다..! 으앗!).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역시 '낯섦'과 '다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 떠오르기도 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소설가가 글을 쓰면서 주인공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글을 쓸 때 적절한 순간 스윽 나타난다는 얘기를 한다. 또 소설로 썼던 이야기와 인물인데 나중에 현실에서 그와 동일한 이야기나 인물을 마주치는 순간에 대한 경험도 나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 세상 곳곳이 아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만 들여다보고 그 좁은 공간에 침잠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려고 항상 노력하고, 주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정함'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부터 또 새로운 세포가 자라나고 세상이 변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태어나게 된다.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처음 볼 때는 재밌는 상상이네, 어디서부터 이 '(소설가와 주인공 간의)관계'가 시작된 거지? 라는 의문만 가졌다. 그런데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 영화가 다시 떠오르자, 이것이야 말로 올가 토카르추크가 얘기한 '다정함'의 결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는 세상에 지대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세상 어느 한 점에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된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인공 역시 세상에 지대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단순히 순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 주위에 더 관심을 가지고 '다정한' 태도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른다. 요즘 모든 사람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그리고 그 스마트폰으로 휙휙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보는 짧은 영상, 사진, 글을 볼 때 조금만 더 다정한 태도를 가져보는 것은 훨씬 쉬울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눈은 내 안에 여전히 고정된 채로 화면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하는 모든 것에 다정함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럼 그 안에서 불쑥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게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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