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에 10년 가까이 다니다가 퇴사 후 어머니가 이십년 가까이 운영해오신 김치공장으로 이직했다.
이 한 문장으로도 너무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제일기획'이라 하면 제일 잘나간다는 그룹사 삼성의 계열사이며 광고회사로서는 가장 큰 회사로 인식되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이 회사를 숫자 '10'에 가깝게 다녔다니 좀 더 완벽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대기업을 잘 다니다가 자진해서 그만두고 간 곳이 '김치공장'이다. 공장이라면, 컨베이어벨트가 그 회사의 생산품-그게 플라스틱이든 식품이든,을 싣고 흘러가면 그 주위에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이지만 꽤 가깝게 둘러앉아서 생산품을 집어들어 수가공하고 다시 벨트 위에 올려놓기를 반복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망사로 된 모자를 쓰고 장화와 비닐로 된 옷, 앞치마같은 걸 입고 돌아다닐 것 같다. 공장의 위치는 도시와는 거리가 먼 구석. 서울 중심지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면 점심 시간에 근처 맛집에서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도 사들고 올텐데.
이 책의 작가님 외에도 '삼성 다니다 그만뒀대'라고 알려진 작은 가게의 사장님을 떠올려본다.
왜 우리는 이들에게 관심이 갈까? 아마 '삼성'이라고 하면 몸이 고생하지 않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텐데. 사회에서 꽤나 '갑'의 위치에 있을 텐데.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공부도 엄청 잘해야했을 텐데. 그런데, 그 환경과 조건을 버리고 어딜 갔다는 거지? 지금 그 자리에서도 그만큼이 충족되는 걸까? 혹은 지금 그만두고 그 자리로 옮겨가도 될만큼 경제적으로 준비가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김치공장으로 떠난 원재씨는 왜 회사를 떠난 걸까? 회사가 너무나도 힘들거나 떠나지 않고는 못 견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이제 회사를 떠나도 될만큼 경제적으로 안정된 것도 아니다(그는 퇴직금을 충분히 홍보되지 못하고 끝난 유튜브 영상 광고 제작에 모두 써버렸다...). 어머니도 어느 날은 '회사 잘 다니던 너를 왜 불러서'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가 어머니의 공장으로 간 이유는 이것 같다.
"회사는 누군가의 자아를 이루는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자존감을 단단히 지탱할 수는 있다."
김치공장이 뭐가 더 좋아서, 나아서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간 것도, 제일기획이 뭐가 더 안 좋아서, 나빠서같은 이유가 있어 떠난 것도 아니다. 어느 직장에 다니든 그는 동료들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하며 '자존감'을 찾으려고 애썼을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원재씨의 어머니가 세우신 김치공장이 어딘지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포스터 광고(!)가 실려있어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ㅎㅎ 참말로 이 책이 최고의 광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원들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탱할 수 있는 회사, 그게 정말 최고의 회사구나. 그게 정말 성공한 삶이겠구나, 라는 걸 깨닫게 해준 원재씨, 그리고 도미솔식품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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