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같기도 하고, 시집 같기도 한 책.
고도원의 아침편지 플래너에 실려있는 글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서 보았다.
조금 거친 듯한. 덜 다음어진 듯한 말귀(?)들.
사랑에 빠진 벙어리 소녀의 마음을 뚝뚝 끊어지는 듯한 말투로 적은 시.
원서 제목은 a gorgeous sense of hope이라고 한다.(분홍주의보 라는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라고 말미에 쓰여있다.)
아마 네가 사라지면 실이 엉키는 악몽을 다시 꾸게 될 거야
겨우 잠들었는데 / 가슴 속에 다른 사람의 심장이 있는 것 같아서 눈을 뜨고 물었다 / '심장아 아직 거기 있는 거 맞지? 이사 가버린 건 아니지?
응 하지만 네가 숨겨둔 말을 내가 보관하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 / 그래서 널 떠날까 생각중이야......
하지만 나는 네 곁에서 지금 아무것도 아닌거야......
이 세상에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많아 / 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지 / 내가 출석하지 않는 삶은 수업을 시작하지 않을 거야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에게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 가만히 그의 '곁'이 되주면 돼 /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곁'은 든든하니까......
이 글귀는 아침편지 플래너에 있던 그 글귀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어요 / 내 눈이 지금 당신의 눈을 건너가고 있어요 / 네 머리칼의 비누 냄새를 기억해. 어둠 속에서 네 손가락 옆에 살며시 대어보던 내 손가락 길이를 기억해. 우리가 첫 눈에 밟고 찍어두었던 발자국들이 몰래 하늘로 날아가던 밤을
이 글이 담긴 페이지가 4월 마지막주였다.
마지막 칸에 내가 연필로 이렇게 써두었다ㅡ
"지금, 난, '버티고' 있는 것일까"
내 머리칼에서 샴푸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게 샴푸 냄새였던, 에센스의 라벤더 향이었던, 컬링 로션의 잔향이었던, 아님 목덜미로부터 시작된 바디밤의 모링가 향이였든ㅡ
난 알 수 없다. 그리고, 알았다 하더라도 향이란 건 원래 이해시킨다거나 설명한다거나 할 수 없는 그런 오묘한 것 아니었던가.
다시 생각해도 바보같았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다..
하나가 더.
거기다, 손가락의 길이를 살며시 대어보았다니.
이게 무슨 우연도 우연도 우연도 지칠 정도로 우연인가 말이다.
하.. 나로 하여금 처음 '낭만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느끼게 해 주었던 순간이었다. 진심으로.
문체도 그림체도 좀 너무 거칠어서 페이지도 조심성 없게 넘어갔고 그랬지만,
왠지 이 세상에서(그것도 생각보다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나 말고 딱 한 사람이 더, 같은 책을 같은 책장에서 꺼내 같은 자리에서(이것까진 아니더라도..), 어쩜 매우 비슷한 자세로 읽으면서 같은 순간을 떠올리며 같은 느낌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
한 번 쯤은 해도 되잖아 뭐, 어때. 이게 바로 '아님말고정신'인가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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