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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긴박한 느낌을 주는, 숨이 긴 문장들로 가득 찬, 그래서 읽는 사람도 숨을 참아가며 후다닥 읽어내리게 만드는 책.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뒤, 서점에 가서 책을 훔쳐다 읽으며 지식을 얻었다는 저자는 '모든 것을 책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책에서 모든 것을 배웠으므로 책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주려 하는 걸까?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아니 앞뒀다기보다도 죽음이라는 과정이 하나의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면, 그 터널을 한참 지나는 중인 칠레인 사제의 독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중에, '빙글빙글 물 위를 돌고 있는 청동 침대위에 누워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순서대로 되짚어 얘기하고 있는 형식인데,
호흡이 너무도 가쁘게 헐떡거리며, 떠오르는 생각들도 분명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사건들이 이어지는 형태가 꿈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하고, 각각의 사건에 대한 기억들도 다 선명한 것이 아니라 실제와 상상이 뒤죽박죽 된 새로운 이미지들이다.

화자의 상태가 정말 죽음이 임박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죽 읽어나가다 보면,
그가 그간 살아오면서 취했던 태도가 늘 주변의 눈치를 보고(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아주 강하게 믿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해보이는 길로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것이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태도가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자는 내내 '늙다리 청년'에 대한 얘기를 한다. 죽어가면서 '늙다리 청년'이라는 일종의 환상을 보는 것이다.

늙다리 청년은 화자를 꾸짖는다. 화자는 분명 아주 잘난 삶을 산 사람인데, 대체 누구길래, 왜 나를 자꾸 꾸짖는거지?

가톨릭 사제로서, 문학 평론가로서, 작가로서, 강사로서, 즉, 종교, 문화, 정치, 사회에 모두 깊이 발을 담그고 의미있는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자기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일개 잘난척쟁이일 뿐이었던 거다.

(1.28 덧붙임;)
이것은 (책 중 125쪽) 이 대목을 보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세계를 누비고 난 후에는 늘 그렇듯이 칠레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 <빛나는 칠레인>이 아닐 테니까."

참된 '진실'을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고, 더 넓은 시야로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하는 '사제'라는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으며, '문학'이라는 것을 도구로써 이용해 당장 살에 닿는 옷감, 당장 혀에 닿는 음식의 질을 높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던 알량한 잘난척쟁이.

늙다리 청년은 바로 이 '진실'이 아닐까 싶었다. 죽어가는 과정에서야 겨우 그 얼굴을 흘끗 본, 그 존재를 의식이나마 하게 된 불쌍한 사람,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작중 화자의 이름).

화자는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또 한번 제대로 위선을 떨치는데,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삶이지 문학이 아니야."
"누구나 단점은 있는 법이지요,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지랄 같은 말이었다. 천재들이나 흠 없는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겠죠. 정말 짜증 나는 말이었다."

 

 

이 말들은 상황 속에선 화자의 위선떨기에 불과하다. 왜냐면 화자는 저렇게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실 자신은 그 말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상황대로 보아 넘기고. 저 말이야말로 저자가 화자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사회에게, 그리고 책 속의 화자에게 직접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사회적 배경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들을 토대로 하고 있어서 그와 관련된 사전지식이 많이 있으면 더 재밌게, 많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게 참 아쉬웠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저자의 문장력, 표현력때문에 정말 소름끼치게 감동을 느꼈다.

한 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부분을 여기에 남기며 글을 맺어야겠다.

"차에 설탕을 넣으면서 찻잔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누가 너를 보았지? 세바스티안, 그리고 누가 널 보고 있지? 혼잣말을 했다. 땟자국 하나 없는 벽에 찻잔을 던져 버리고 싶고, 무릎 사이에 찻잔을 끼고 울고 싶고, 난쟁이가 되어 따뜻한 차에 풍덩 빠져 설탕 알갱이가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알처럼 가라앉아 있는 밑바닥으로 잠수하고 싶었다."

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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