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p.53

이뉴잇족 시인인 파네구소가 들어와서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알았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지. 그냥 진실하려고 했을 뿐이지만, 거기엔 아름다움도 있었단 말이야. 그건 관습이었어."


p.57

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해요. 그것은 시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


p.65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자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p.86

함께 겪었던 패배 덕분에 서로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남자들이요. 그게 오래 지속되는 거에요.


p.92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p.96

미래가 황폐하다면 대신 과거가 풍요로워지는 거죠!

(해진 자수를 뒤집으면, 맨 처음 염색할 때의 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명주실 뭉치를 조게 되는 것처럼요.)


p.105

자발적 용기는 젊은 시절에 시작되죠. 나이가 들며 생기는 건 인내에요. 세월이 가져다주는 잔인한 선물이죠.


p.127

이게 오늘 밤 당신에게 꼭 해야만 했던 이야기에요.

아이다가 스무 살의 그녀(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가 잠깐 마주치곤 사랑에 빠졌던 '라미'가 죽음을 맞은 뒤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얘기를 전해준 뒤 편지의 마지막에 적은 문장이다.


p.205 타르트 귀신인 내 눈에 더 각별하게 들어왔던 장면.

타르트를 먹을 수가 없었어요. 설명할 수도 없었죠. ...

우리는 피로를 잊고 있었어요. 미 소플레테, 피로는 그녀의 남편 알렉스가 촛불을 세울 때처럼 아주 인내심이 강하죠. 피로는 기다릴 줄 알고 녹이랑 비슷해요. 피로는 가장 강한 의지까지 갉아먹고, 가장 뜨겁던 희망도 붉은 먼지로 바꿔 버리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에너지를 해쳐요. 피로는 끊임없는 유예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하죠. 마침내 가장 빠른 대답을 택하는 거에요. 무엇보다도, 피로는 조용함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죽음이 가지는 조용함이라는 사실에도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아요.

말린 살구를 넣어 만든 살구 타르트는 어떤 맛일까. 어떤 감각일까.


p.211

어떤 시인도 한 편 이상의 시를 쓸 순 없을 거에요. 평생 걸리는 일이죠. 어쩌면 본인은 짧은 시들을 여러 편 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들도 모두 긴 시 한 편의 일부에 불과해요.

무엇에 관한 거에요?


p.214

이 페이지에는 카시에르의 메모가 적혀있다. 감시탑에서 떨어진 것인지, 운동장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던 하얀색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 이야기. 등뼈가 부러졌다고 했으니 어딘가에서 떨어졌던 게 맞긴 했겠지. 하얀 고양이는 열심히 세수를 하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사비에르의 메모에 따르면 수의사였던 카뎀이 미소를 띠었다고 했다. 낮게 웅얼거렸다고 했다. "상처만 입고 간 거야."라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녀석은 탈출했다."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을 지날 때마다 책 모퉁이를 접었다. 뭔가 내 책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야릇하게 기분이 좋았다. 반납하기 전에 걸음을 걸으면서 휴대폰으로 그 페이지들을 열심히 사진찍었다. 그리고 옮겨 젹었는데, 삼일 전 쯤에 사진찍어둔 페이지 두 쪽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야,

일부분만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지.

이 부분과, 이어지는

소식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한 녀석씩 일요일마다 전화를 해. 돌아가면서 말이지. 그러니까 오 주에 한 번씩은 다 통화를 하는 셈이야.

자제분들이 어디 산다고 하셨죠?

멀리 살지만 여기-그는 자기 손을 가슴에 갖다 댔어요-도 살지. 다들 다른 곳에 살지만 여기서 모이는 거야.

여기서 모인다. 라.


원랜 글을 먼저 쓰고 책 내용을 기록했는데 오늘은 순서가 반대다.

교보 북뉴스에서 편지로 쓰인 책이라고 소개된 것을 보고 도서관에 주문했는데, 사실 처음 책을 주문할 때 난 책의 내용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몇백 년 전 쯤 되고, 두 남녀가 서로를 그리며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상했던 내용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법한 그런 오글거리는, 혹은 그리움과 애정이 듬뿍 담긴 글을 읽고 싶었던 건 아니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데 있어 진심을 담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던 즈음이라 단순히 '남의 편지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소개를 보면서 내가 오해했던 바가 맞았다면 이 책에 실려있을 편지는 진심이 가득 담긴 편지일 거니까.


완전히 딴판이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소설의 실제 내용은 이보다 더 무겁고 심오했다. 정치적 상황에 휘말린 이슬람 국가 어딘가 혹은 이집트라고 추정되는 곳이 배경이었고, X는 감옥에 갇혀있다가 탈옥을 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의 연인 A는 X에게 편지를 쓰며 일상을 다독이고 그가 부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메운다. A의 하루하루는, 절대 그저 편안하지만은 않은 매 순간의 삶의 조각들과,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쳤지만 형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A는 그 안에서 X가 실재했던 과거, X가 여전히 함께라면 혹은 이곳에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그의 존재를 느끼는 현재, 또 X의 영혼이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 분명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리된 시간이지만, A의 편지 안에서 그 세 가지 시간은 X의 존재 하나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존한다.


그녀의 말들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으며, 아름답다. 감옥에 갇힌 연인을 만나러 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편지가 언제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그와의 결혼 신청을 세 번이나 거절당한 사실 같은 것은 '창 밖의 나뭇가지에 참새가 앉아 지저귀다 날아갔어요'같은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들릴 정도로, 일상적이고 편안하다. 그녀의 의자 덮개 천 아래에 숨어있던 밝은 빛깔의 명주실뭉치처럼 그녀 자신을 포함하여 그녀의 말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과 슬픔은 선명하게 밝은 빛을 내며 더러워진 천 아래에 처음 모습 그대로 뭉쳐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 버거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까? 책의 마지막 장에 X가 탈옥을 했음을 암시하는 '오늘 밤의 탈출 경로' 메모도 함께 말이다.


사실 존 버거라는 사람에 대해 접하게 된 게 이 책이 처음인데, 책의 맨 뒤 옮긴이의말에 보니 최근(이래봤자 몇 년 전) 이스라엘이 공격받았을 때 블로그에 쓴 기사에 대한 언급과 링크가 소개되어 있었다. 정말로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내용을 담은 글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검색해봤는데, 그의 경력은 이 책의 내용과 흐름에 대해 '아~'하는 이해가 나오게 했다. 문학가로서도 유능할 뿐 아니라 미술평론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 등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이런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X를 향한 A의 마음과 A가 X와 함께하는 시간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저자는 '카드놀이'가 아마 그 일일 것이라고도 말했지만, 편지들을 읽으면서 내 눈에 카드놀이는 그저 카드놀이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지는 상황들과 X의 메모들을 보면 이 소설은 특히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 행해지고 있는 무자비한 공격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고발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만 같다는 거다. 하지만,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굳이 아반어적인 표현을 하고 싶어 애쓰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말하건대!) A의 목소리에는 일상 속에서 X를 찾고자 하는 절절함, 그 이상도 이하도 들어있지 않다.


책의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도 이런 얘기가 들어있었던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심'들이 모여 세상이 이뤄지는 것이고, 이 책은 아이다의 말 속에 수많은 세상 사람들의 진심들을 하나 하나 녹여 그녀의 편지를 통해 세상 곳곳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편지 속에서 X의 존재를 통해 모든 시간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그러졌듯, 그녀의 손짓, 그녀의 말을 통해 세상 곳곳의 공격받고 슬퍼하도록 내던져진 사람들의 시간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순서를 거꾸로 시도해서 그런가 너무 오랜만에 끄적이기를 시작해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무튼, 글을 적고 다시 읽어보다 찬바람이 감도는 휴게실에서 또 잠이 들고, 문단 순서를 여러 번이나 바꿨지만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글이 되어버렸다. 의도적으로 깊고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철학적인 책은 분명 아니었지만, 존 버거의 간결하고 담백한 글-아니 사실 존 버거가 아니라 아이다의 글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아이다의 일상을 세세하게 묘사한-감정이 절제된 것은 분명 아닌- 편지글을 통해 작은 구멍 아래로 넓게 펼쳐진 세상을 내려보는 듯한 경험을 준 책이었다.

Posted by sollea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