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하게 됐는데, 기왕이면 새로운 책으로 필사를 하면서 문장도 배우고 좋은 문구도 많이 읽고 싶었다. 그래서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생각하는 취향이 내 맘에 드는 두 언니 오빠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다. 한 책으로 두 달째 필사를 하고 있고, 또 한 책은 그냥 읽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이 책을 읽었다. 피천득의 '인연'.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과 동시에 읽었다.
김연수는 소설쓰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종이인간'을 여러번 말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이인간과 같다고. 너무 감정이나 표현이 솔직하게 드러나면 종이인간들은 그 감정에 불타버리고 만다고.
피천득의 수필은 종이인간이다.
이 책에 담긴 피천득은 이미 다리가 접혀버려 휘적대고 걷는 종이인형이다.
'피가지변'은 그 종이인형의 우울하고 울적한 중얼거림, 혹은 노래다.
아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참지 못하고 엄마한테 이 책 "영~ 별로"라고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사소한 일, 아무것도 아닌 소재 하나에 이 종이인형은 음울하게 웃었다가, 금새 울적해졌다가
노기를 보글거리는 얼굴표정을 지어놓고 속으로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한다.
왜 그리 속으로 외쳐야 할 말들이 많았던 걸까.
그가 사랑한 문인들, 그가 사랑한 딸 서영이로 가득했던 이 세상.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살다가진 못했던 듯 싶다.
그는 애정을 너무나도 필요로 하였고, 애정을 너무나도 나누어주고 싶었던 사람같다.
안타깝게도 그가 원했던 만큼이 받을 수 있었던 만큼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나누어주는 데 있어서 그는 줌 그 자체에서 행복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이 준 것을 잘 받았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이 수필집에 담긴 그의 모습은 종이인간 그 자체다.
종이인간의 뒤를 쫓아가느라, 그 종이인간이 흐느적거리면서 웅얼거리는 울음섞인 소리를 들어주느라 나도 힘들었다. 나 역시 너무나 감정에 휩쓸려서 책장을 넘길때마다 허허 웃다가, 뱃속에서 꾸물꾸물하며 분노가 솟아오르다가, 또 베갯잇이 젖도록 눈물이 나다가 했다.
슬픔에 푹 젖고, 분노에 파르르 타버리고, 누렇게 버썩 메말라버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서영이에게 더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 사이에서 이 종이인간은 흠뻑 젖었다가 새파랗게 타버렸다가 누렇게 말라버리기를 반복한다.
이 종이인간은 그러고도 잘 살아있다는 게 신기한 정도였다.
아마도 그가 사랑한 딸 서영이 덕에 살아있는가 보다.
그가 쓴 말들 중 맘에 드는 것들을 조각조각 적어놓았다.
대견하다. 뉘우쳤다. 여름 보리.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그는 싱싱하고 윤택하고 '오월의 잉어'같았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고,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로버트 프로스트)
그는 단칸방 안에 한 우주를 갖고 있다.(치옹에 대해. 아래 두 줄 역시 치옹에 대해.)
갑자기 전화를 걸고 덕수궁에서 만나자고 한다. 마음에 드는 글이 써진 것이다.
다 읽고 나서 정말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이대로 주어도 될까" 물론, 대개가 일품이다.
이것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문인들의 묘지를 두루 순례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앞을 바라보며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늙어가는 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좋아한다.
겨울 교복 바지는 때에 절어서 윤이 나고, 호떡을 먹다 떨어뜨린 꿀이 무릎에 배어서 비 오시는 날이면 거기가 끈적끈적하였다.
얼마 아니 있으면 첫눈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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