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서가에서 정말 파-란 색의 표지를 한 책을 발견했다. 정말로 '파-란'색의 책등에 하얀 글씨로 새겨진 제목. 눈길을 확 끄는 책이었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시골의 집에서 정원을 가꾸는 삶에 관해 쓴 일기같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위해 쓰여진 글들은 아니고, 여기 저기에서 발행되었거나 발행되지 않았던 글들이 후일 모여 엮여나온 책이다.
헤르만 헤세는 눈에 띄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눈에 띄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책의 맨 뒤에 보면 그에 대한, 그리고 이 책에 실린 글을 쓰던 헤세에 대한 소개가 조금 나와있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하고 유명해진 헤세는 문인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었고, 연속적으로 대작을 발표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정원과 숲이 있는 시골로 들어갔다. 사실 여기서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어색한데, 그는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갔을 뿐이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피해 시골로 몸을 숨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을 굳이 정리하자면 '정원과 자연으로 귀의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월든과는 내용과 성격이 아주 다르다. <월든>에서 소로는 세속적인 세상을 떠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끊임없이 사색하고 철학한다. 그 결과 본인이 얻게 된 이치, 가르침을 정리한 글이 바로 <월든>이었다면,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전혀,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연과 함께 살아갔을 뿐이다. 그의 글 속에서는 나무 하나 마당에 자라나는 풀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향을 뿜는다. 그 어떤 가르침이나 깊은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읽다보면 일상의 따가운 햇살이 얼마나 소중한지, 길가에 핀 풀이 얼마나 예쁜지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든, 정말 일기장을 펼쳐보는 기분이다.
이것이 헤세가 의도하여 집필한 책이 아니라 후일 엮여진 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테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그렇게 편안하게 읽힌다. 그런데 실상 이 글을 쓰던 시기의 헤세가 마음도 불안정하고 몸도 쇠약해져가던 시기였다는 게 정말 놀랍다. 그는 당시 어지럽던 독일 사회에서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일부러 피한 것도 사회 정세에 무관심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지속해나가고싶었을 뿐이다. 그 뿐이다.
이런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왜 우리는 평범한, 부딪히지 않는 삶을 내버려두지 못하는가. 평범함은 사실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매우 개성있고 튀는 것보다도 이루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이룰 수 없지만 마음 속으로 동경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동경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평범하을 이룬 것을 보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대답을 했다. 질투와 시기, 분노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우리는 정원에서 보내는 헤세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어렸을 적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작은 풀꽃이 얼마나 예뻤었는지.
새롭고 남들과 다른 것, 튀는 것을 찾아헤매느라 인생을 바쁨과 허덕거림으로 보내는 동안 우리 자신이 얼마나 사라져가는지, 그것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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