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진짜 이런 책은 또 처음 봤다.
책에 관한 책을 재밌게 읽어왔던 터라 관심이 간 책이다. 약 300여권에 달하는 책이 소개되어있는 '책 소개 에세이'모음집이다. 다만 소개된 책들이 일본 국내 책 시장의 것들이어서 공감하거나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책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이 책을 집는다면 낭패를 볼 것이다.
하지만, 저자인 사카이 준코의 글쓰기 방식, 글을 쓰기 전에 머리와 마음을 정리하는 태도, 글의 흐름을 통해서는 배울 것이 분명히 많다. 특히나 책의 초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 글이 흘러가는 방식이 점점 발전되고 정리되는 것이 보이는데, 이런 책은 정말 흔치 않다.
초반에는 정말 이런 식의 글쓰기는 처음이다, 라고 생각한 정도다. 황당할 정도였다. 문단과 문단 사이 이야기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친구랑 카페에 앉아 하릴없이 수다를 떤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글 소재가 여기서 저기로 마구 넘어갔다. 마무리에 가서도 소재는 돌아올 줄 몰랐다. 그냥 하던대로 쭉 얘기하다가 할 말 다 했으니 끝, 하는 모양. 동그랗게 눈을 뜨고 순진한 표정으로 "수미상관, 그게 먹는건가요?" 묻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녀의 글을 처음 접해본 독자로서, 지금 독자를 두고 장난을 치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중에 책을 모두 읽고 알게 된 사실인데(옮긴이 후기에 이 말이 나와있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사카이 준코가 몇 년에 걸쳐 연재한 글을 모아 정리한 것으로 책에 실린 순서가 글이 작성된 순서대로인 것 같았다. 어쩐지... 책의 중반부만 지나면 어,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하고 놀랄만큼 글의 흐름, 내용의 부드러운 유기성이 생겨나있다.
보통 책을 한 권 엮는다고 하면 무작정 글을 순서대로 묶어잡아 책등을 엮는 게 아니다. 책 전체가 흐름이 있고 이야기가 있도록 기획을 하고 또 책에 들어가기 전에 안에 들어가는 글들을 다시 다듬고 정리하는 과정이 따른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이 책은 다양한 책들 - 그것도 특정 주제로 엮은 책들도 아니고 서점에 들어가서 진열된 책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고, 손으로 만져보는 과정. 그리고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집어들고 펼쳐보게 된 책들을 소개하는 책이며, 사실 '책을 소개하는' 책이라기보다도 '책을 살펴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더 다듬고 고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글을 글이 쓰인 순서에 따라 순서 그대로 실은 것이,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 사람의 모습을 정말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고, 그것도 서점을 자주 들르는 일본인이었다고 해도 특별히 '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을 책은 아니었던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점에 특정 책을 구입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간다. 서점에 들어가면 곧장 그 책이 있는 곳으로 가고, 그 책을 뽑아들어 계산하고 서점을 나온다. 하지만 서점은 그 이상의 기능, 아니 재미를 갖춘 곳이다. 한 책 옆에 다른 책이 있고, 그 책 옆에는 또 다른 책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구경거리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이 바로 서점인 것이다. 책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 역시 너무나도 다양하다. 책표지, 책등을 구경하는 것, 한 작가의 책들을 주르륵 살펴보는 것, 앉아서 책 한 권을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 후르륵 책장을 넘기며 책을 훑어보는 것 등. 또 책의 종류는 얼마나 다양한가.
사카이 준코의 초반부 글, 유기성 없어보이는 그것들은 목적없이 서점에 처음 왔다가 두려워하는 '서점즐기기 초보자'의 모습같다. 하지만 후반부의 부드럽게 흐르는 글은 원래 서점에 가려던 생각도 없었는데, 단순히 시간이 십여 분 남아 자연스럽게 서점에 들어갔는데도 그 십 분을 알차고 즐겁게 보내고 나올 수 있는 '서점즐기기 고수'의 모습과 같다.
그녀의 글 흐름이 '진화'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몇 개의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쓸 때 아, 이런 식으로 생각의 흐름을 잡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구나, 라는 것도 배울 수 있고, 서점이라는 곳이(혹은 책이 가득한 도서관 서가!) 가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정말 재밌는 곳이구나, 라는 것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 서점에서 단순히 책을 훑어보고 서가를 걸으며 책등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는지 꼭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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