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을 갈구한다.
그녀의 소설에는 '불편함'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나온다. 단순히 불편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불편함을 찾아 헤매고 불편함을 느끼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사실 이들은 삶이 너무나도 풍요롭다거나 부유해서 불편함이라곤 모르고 살아왔던 이들도 아니다. 그런 그들이 불편함을 찾아다니고 굳이 돈과 수고를 들여가면서까지 불편함을 느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몸이 '불편함'이라는 감각에 너무 무뎌져서?
표제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뿐 아니라 이 책에 담긴 모든 소설에는 불편함을 상징하는 요소가 대놓고 등장한다. 꼽추, 이름도 모르는 이의 마스터베이션, 오른쪽에 위치한 심장같은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등장하는 불편함은 사실상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지 못한다. 이것들을 마주 대하고 느끼는 불편함은 머리가 인지하고 지시하는 단어로서의 불편함이다. 그리고 이건 읽는 사람뿐 아니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불편함을 느껴야 할 것 같은 것을 대하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진짜 속마음은 불편함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대놓고 드러나는 이야기가 바로 표제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였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대놓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불편함을 배워서까지 얻으려고 하는 주인공.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앞뒤가 똑같은 너구리가 아닌, 그 너구리 꼬리 안에 숨겨진 음흉한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만다. 너구리의 몸통 속에 숨겨진 너구리의 '뒷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짜 불편함'. 몸이 고통스러워 하고, 참아낼 수 없는 불편함을 갈구한다. 불편하다고 여기저기서 외치지만 입은 벙글벙글 웃고 있는. 땀 한 방울 솟아나지 않는. 그저 단어뿐인 불편함은 불편함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성장한 소라게가 버리고 떠난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진짜 불편함을 찾고, 얻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런데 왜? 왜 '불편함'을 갈구하는 걸까? 작가 한은형, 그녀는 우리가 편리성과 안락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실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이건 너무 진부하다. 오히려 우리 본성이 불편함으로부터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 사우나>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서슴없이 '빨갱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그러하다.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불편함으로부터 희열을,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만큼이나 그녀의 소설을 읽는 우리도 불편함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지 모르겠다. 지하철에 서서 그녀의 불편한 이야기를 읽으며 혹시나 옆에 선 사람이 내가 읽는 책장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신경썼다. 책 속에 나오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몸의 근육에 힘이 꽉 들어가는데 입가엔 슬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던 것도 같다.
그녀는 불편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굳이 숨기거나 덮지 않는다. 불편함을 갈구하는 우리의 몸짓이, 눈길 가는 방향이 애초에 불안정하다. 그녀는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아무런 꾸밈 없이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거울을 눈 앞에 들이대는 꼴이다.
너무도 긴 여름. 그 더위에 녹아 흐물흐물해지기에 저항하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쾌감을 위해 너구리의 꼬리를 시원하게 가르는 것. 불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하거나 눈에 띄는 특이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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