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의 로망이야말로 전 세계 어딜 가도 있다. 만원인 기차에 입석으로 올라타서 삶은 계란이랑 사이다를 먹는 로망. 기차여행 패스를 끊고 계획없이 아무 역에나 내려보는 로망같은 것들이다.
내 가장 오래된 기차여행의 기억은 열 살도 되기 전의 것이다. 그 때 부모님 손을 잡고 오빠랑 네 가족이 기차를 타고 남이섬에 갔다. 막 출발하려던 기차에 오빠와 아빠가 앞서 타고,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얼른 올라탔었다. 그 다음은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엄마가 까주신 삶은 달걀을 먹었던 기억이다.
예전처럼 입석 손님들로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처럼 기차가 가득 차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에 걸려 여행하는 일, 사람들로 부대끼는 기찻간에 친구들과, 가족들과 끼어앉아 짐보퉁이를 들고 가는 일은 그야말로 "옛날얘기"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기차여행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이번 일본여행에서도 '기차여행의 로망'이 있었다. 하나는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 '에키벤', 또 하나는, 하카타에서 첫 번째 목적지인 유후인까지 가는 기차 '유후인노모리'였다.
하카타에서 유후인까지 가는 기차는 유후와 유후인노모리 두 가지가 있다. 유후인은 작은 지방도시라서 그런지 기차가 자주 다니지도 않고, 노선이 다양하지도 않다. 유후는 우리나라의 새마을호같은 느낌이고, 유후인노모리는 관광열차다. 유후인노모리의 제일 앞량에 앉게 되면 앞유리창을 통해 전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아주 일찍부터 예매를 한다고 한다. 우리가족은 북규슈지역에서 자유롭게 열차를 탈 수 있는 철도패스를 구입했고, 이 철도패스로는 미리 좌석을 지정해서 예매하는 게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구입하는 것은 교환권같은 것이라서 일본에 도착한 후에 여권을 확인하고 교환권을 실제 레일패스로 먼저 바꿔야 한다. 패스 교환창구는 역에 가면 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유후인노모리 열차는 거의 다 예매를 하기 때문에 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타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또 철도패스를 구입한 여행사 직원은 자리가 항상 남아 있으며, 매진이 되어도 이 패스로 입석처럼 탑승이 가능하다고 했다. 뭐가 맞는 말인지 모르겠기도 했고, 부모님이 입석으로 타서 서서 가실 순 없으므로 공항에서 하카타역에 도착한 후에 바로 열차 티켓 창구로 향했다.
하카타역 중앙에 있는 레일패스 교환창구. 엄마랑 창구에 가서 패스를 교환하고 있는 걸 오빠가 뒤에서 찍었나 보다.
패스를 교환하고, 타고자 했던 유후인노모리 열차에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니 너무도 당연하게(!) 있다고 해서 네 자리를 지정했다. 그럼 열차와 지정한 좌석이 인쇄된 티켓을 준다. 좌석 지정 없이 타게 되면, 레일패스만 보여주고 남는 자리에 가서 앉으면 된다. 하지만 남는 자리가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도착하자마자 열차표를 교환하고, 키와미야에 가서 점심을 해결한 뒤 지친 채로 우리는 역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유후인노모리 열차.
유후인노모리 앞에서 엄마와 아빠.
열차를 타기 전에 하카타역 내의 에키벤 상점에서 우리는 도시락을 하나 샀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었는데, 데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차갑게 그냥 먹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젓가락과 생수도 구입. 처음에 물어보니 도시락 안에 젓가락이 하나 들어있다고 하더니, 없더라. 하나 구입하지 않았으면 맨 손으로 집어먹어야 했을뻔..
유후인의 숲이라는 뜻을 가진 유후인노모리 열차는, 유후열차보다 조금 더 천천히 운행하고, 가면서 볼거리를 지날 때 차장이 방송으로 설명도 해 준다. 또, 유후인노모리 내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도시락도 판매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패스. ㅎㅎ
분명 겉포장을 봤을 땐 무슨 장어 덮밥처럼 생겨서 샀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알 수 없는 것으로 둘러싸인 밥이었다. 오뎅같기도 하고 생선살 같기도 하고 유부같기도 하고.. 아직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는 분은 제보 좀.. 그리고 저 명란은 후쿠오카의 특산품인 매운 명란젓이라고 하는데, 오빠는 맵고 비리고 별 맛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았다. ㅋㅋ
키와미야에서 먹은 고기 한 덩어리가 부족했던 오빠는 열차를 타고 가면서 산 에키벤을 먹었다. 아직도 우리는 이 에키벤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아시는 분 제보좀..)
에키벤에 대한 평가는, 실제 내용물에 비해 값이 좀 비싼 것 같다, 는 것. 그리고 차가운 밥을 먹는 게 우리는 익숙치 않다. 에키벤은 특별히 대단한 것은 없었고 차라리 편의점 음식을 구입해서 먹는 것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ㅎㅎ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는 기차도 그렇고 탈 것 안에서 음식물을 먹는 것이 공공예절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있지 않나 한다. 음식냄새도 나고, 쓰레기가 발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기차를 타는 동안 도시락을 먹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영화에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오고 말이다.
유후인노모리 열차는 각 량 앞 뒤에 유리문이 있다. 우리가 탄 열차가 제일 끝량이었던 것 같다.
열차 뒷쪽 문 창 너머로 보이던 철로와 창에 찍혀있던 유후인노모리 로고.
어쨌든 두 가지 기차 여행의 로망 모두 이뤘다. 첫 번째인 유후인노모리 타기, 두 번째인 에키벤 먹기 모두. 열차 안에서 들려오는 방송은 모두 일본어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름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다가 깜빡 잠들기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오빠랑 떠들고 하다 보니 유후인에 어느새 도착했다. 시간은 저녁무렵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동영상은 유후인노모리를 타고 가면서(하카타~유후인) 찍은 타임랩스와 짧은 영상을 합친 것이다.(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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