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선생님의 번역이 없었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51편의 산문시 뒤에는 각각에 대한 번역자의 주해가 실려있다.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는 이 산문시들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무언가를 빗대어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보들레르가 각 시를 쓴 배경, 무엇을 지칭하는 비유인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을 땐 이해하기가 어려웠고,책의 뒷부분에 실린 주해를 보고 나서야 재미를 느낄수 있었다.
보들레르는 진실하게 '예술'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의 모든 시들은 에술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잃어버린 자들, 겉모습에 쉽사리 현혹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 세상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들이 아니라 진실된 아름다움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진짜 예술'을 향한 그의 마음이 시 안에 녹아 있다.
한 가지 재밌었던 점은 주해를 통해 알게 된 보들레르의 '여성혐오증'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보들레르는 그의 시 안에 여성에 대한 경멸어린 시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부정적인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까닭 역시 예술의 순수한 본질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술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 진정성 있는 예술,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보들레르가 평생에 걸쳐 가졌던 생각, 사명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마르탱 파주의 <빨강머리 피오>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사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빨강머리 피오>는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 그 작품에 입혀져 있는 어떤 '이름'에 합당한 감상을 떠올리는 데 급급했던 건 아닌가 생각하게 했다. 이 소설과 보들레르의 시가 다른 점은 바로 시점이 반대라는 점이다.
<파리의 우울>에 실린 시들에서 보들레르는 시인들을 향해 진심을 담지 않은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깊은 의미를 담은 비유를 실어 예술작품, 특히 시를 쓰는 시인들을 질타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고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시인이 아니며, 그들의 작품 역시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시 중에서는 스스로 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악을 행하는 것이 진정 악하다는 문구도 나온다. 이처럼 그의 산문시는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보들레르라는 사람이 시를 대하는 데 있어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가졌는지 알고 본다면 생각해 볼 점이 많다. 또,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는 좀 더 진지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할 지에 대한 힌트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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