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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과거에 대한 두려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이다. 조금 바꿔 말하자면, 지나간 과거에 있었던 일이 다시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의 어느 날 일어날거라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에서 바로 '트라우마'가 생긴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보면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결국 그 원인도 결과도 내 안에 있는 무엇이다. 그걸 찾아내기가 쉽지 않고 찾아낸다고 해도 마주하기는 더 어려운 것이 트라우마다. 하지만 그 존재를 느끼는 순간, 트라우마는 물에 담근 미역처럼 퉁퉁 불어오른다. 그리고 문제는, 이미 불어오른 뒤에는 그 시작점이 어디인지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 안의 트라우마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결코 트라우마가 내 안에 있던 씨앗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트라우마란 가깝게는 나의 부모, 멀게는 오래된 조상이나 먼 친척으로부터 나에게로 옮겨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책에서 그 동안 자신이 상담하고 치료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트라우마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사례들에서 트라우마는 먼 친척이나 조상들로부터 나에게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옮겨옴'의 과정을 저자는 '유전'이라고 설명한다. 세포 안의 변화, 유전자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내가 알지 못하는 먼 조상에게서 유전되었다'고 하는 그 씨앗은 사실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언제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때에 전해들었던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다가 내게 트라우마를 일으킨 것이라면 그 씨앗은 내 무의식에 있던 것이지 어느 순간 돌아가신 조상에게서 내게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원인을 더더군다나 '유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유전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세포 내 유전물질에 의해 어떤 형질, 특성이 후손에게로 전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을 개체, 사람의 경우 뱃속의 태아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된 유전물질 외에도 살면서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후성유전'이라는 개념도 있다.

후성유전은 살면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유전물질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물려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후성유전에 관여하는 '메틸화'라는 것, 또 'CSF'라는 인자에 대해서는 분명 더 많은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다. 나 역시 지난 해(2015년) 10월 경 동성애와 관련한 연구에 대해 기사를 쓰다가 후성유전학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 때에도 이 물질과 구조변화가 어느 정도, 또 어떤 경로를 통해 자손에게 유전되고 그 결과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명확하고 모두가 지지하는 사실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만났던 내담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지금 상태에 영향을 미친 과거 조상의 어떤 트라우마를 찾아내 얘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저자가 내담자들의 가계를 일일이 조사하여 탐정처럼 알아낸 것이 아니라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삶, 과거 가족력 등을 찾아보면서 깨닫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트라우마는 먼 조상에게서 정말 '유전'되었다기 보다 먼 조상과 연관지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어느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었는가'를 찾는 과정이 의미없다는 건 아니다. 치료사로서 내담자들이 외면하고 있던 자기 안의 어떤 아픔을 찾아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 그의 역할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맞다. 다만 그가 그들의 트라우마를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석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좀 걱정스러울 뿐이다.

내담자들의 사례에서 모두 그들이 가진 트라우마는 과거 조상들에게서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 숨어있는 유전자로 존재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깨어나 발현하게 된 것이 아니다. 과거 조상들이나 먼 친척의 사례를 찾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뿐이지 결국은 내 몸과 마음에서, 내가 겪은 환경과 상황들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다. 그들은 과거 조상, 먼 친척의 일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생의 어느 때에 전해 듣고 자신의 경험으로 체화했고 자신 안의 기억이 트라우마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미 발표된 학술 자료들을 근거로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 논란이 많은 분야에서 한쪽 분야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다. 특히 과학적으로 유전, 후성유전 등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우 유사과학(pseudo-science)적 믿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내담자들이 가진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경험은 높이 사야 한다. 하지만 그의 경험을 듣는 이들 중 지금 어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어느 날 내 안에서 갑자기 눈을 뜬, 유전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쓸까 봐 겁이 난다. 어찌됐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건 내 살갗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의 기원이 무엇인지 충분히 탐구하고 내 역사를 성찰하는 것은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 살갗 안에 있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 언제고 먼저라고, 이 책을 들춰볼 모두에게 당부하고 싶다.

Posted by sol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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