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근대국가로 본격적인 발돋움을 시작하게 된 시점은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고 한국전쟁을 겪은 뒤다. 대부분의 텍스트와 미디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때 이 시기는 쿠데타, 군사독재, 유신정권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은 체제 자체에 대해 깊숙히 분석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내용을 살피기보다, 한국 근대 발전 시기를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역사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어떤 텍스트에서 보지 못했던 좀 더 객관적이고 새로운 시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먼저 '근대'라는 말의 정의를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던'을 예술사조에서 사용하는 '모더니즘'과 구분하는 데서 근대라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한다. 그리고 8개의 주제(8장은 사실 마무리하는 내용이라 7개라고 봐야 한다)로 근대 국가 형성 요소를 나누어 살펴본다. 건설업, 정치선전, 문화예술뿐 아니라 왜 한국 사회는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적인가에 대해서까지 얘기한다.
무엇이 한국을, 정확히 말해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이루는 근대 한국을 만들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저자는 '만주국'과 '식민지배의 영향'에서 찾고 있다.
한국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던 시기인 30~70년대에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그것이다. 우리는 식민 통치의 아픔 때문에 일제에 대한 반감, 거부감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런 감정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식민지배라는 환경이 피식민국과 피식민자에 미치는 지적 영향을 객관적인 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단순히 일본이 한국에 행한 온갖 악행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30~70년대 사이에 동아시아에 나타났던 식민자-피식민자 구조에 대해 살펴보고, 그 중 한국에 영향을 줬던 국가의 구조와 한국의 것을 비교해보는 식이다.
특히 한국의 근대 국가 시기를 이끌었던 60~70년대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만주국 출신이라는 점을 포착하여 저자는 만주국이 한국의 근대국가로서의 발전에 미친 영향, 특히 그 구조적 유사성을 분석한다.
만주국이라 하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서희네가 옮겨갔던 그곳, 새로운 땅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아주 살짝 살펴본 만주국은 완전히 새로웠다. 중국도 일본도 아니었고, 렇다고 조선의 땅도 아니었던 곳. 완전히, 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땅. 기회의 땅. 그리고 실험의 장이었다.
이곳에서 개인부터 국가까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과 도전이 수없이 일어났고 그 투쟁자, 도전자들은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그 곳에서 새로운 지휘봉을 잡고 새로운 터전을 닦았다. 만주에서의 승리와 성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은 그 시절 구현했던 구조를 재연했고, 그렇게 근대의 발전을 이뤄냈다.
싱가폴과 한국을 비교하는 부분은 한국의 60~70년대 발전 계획이 진행된 과정을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농업국가라는 우리나라의 특성, 단기간에 '북한'을 따라잡겠다는 특수한 목적이 무조건 빠르게, 누구보다 강하게 뚫고, 메우고, 세우게 만들었다.
눈부신 '평양속도'를 자랑하던 북한은 지금 왜 이렇게 정체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 60년대의 집단적, 무차별적 개발 과정은 도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걸까. 여기에 대해 이 책은 기존의 비판적인 시선과 달리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정당성을 따져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의식에 스며들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게 된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군신화(軍神化)에 대해서도 5.16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충(忠)사상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에게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근대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구조적 요소'이며, 만주국에서 발견되었던 구조의 재연으로, 우리나라 근대 발전 시기의 구조적 발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무엇(a thing)일 뿐이다.
마지막에서 저자는 만주국을 일제 식민시대와 연관짓고, 식민 통치의 아픔과 분노에 묻혀 그에 대해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우리나라 근대 발전 시기에 그것이 미친 영향에 대해 고려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 분명 그 때의 아픔과 한국인들의 고통,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근대 발전 시기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그 범위가 넓다. 사람을 떠나서 국가와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그러나 아직 더 많이, 그리고 깊이 분석되고 다뤄져야 할 50~70년대를 조명한, 중요한 사실을 담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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