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기사 때문이었다.
"소박한 개인주의자"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나도 피해보고 싶지 않고 내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도 존중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단체행동이라는 데 질릴만큼 질릴 무렵이었고, 소박하면서 따뜻한 그의 글들을 몇 편 읽어봤던 게 노란 그 책을 궁금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의 음성은 높고 거칠었다. 부드럽고 유순할 것만 같았던 그의 목소리에 대한 묘사 역시 높고 새된, 잘 들리는 주파수는 아닌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를 읽는 내내 그의 모습이,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가 너무나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싶어졌다. 여러 명의 인터뷰어와 대화하면서, 녹취를 푸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겠지만, 분명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변화가 있었다. 이렇게 글이라는 건 어렵다. 인터뷰는 더 어렵다. 어떻게 해도 한 사람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들이 '페미니즘'적으로 평가받아왔다는 데에 조금 놀랐다. 당연히 내가 그의 글을 충분히 많이 보지 않았던 거겠지만, 그런 인식보다는 소박한 삶의 풍경을 그렸고, 세상과 사회보다 자기 자신의 삶과 일상을 소중히하는 작가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이, 또 자신의 태도가 페미니스틱하다는 평가를 달가워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나가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됐고, 그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소박한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그에게 사람들은 절대 '소박'하지도 '개인적'이지도 않게 접근했다.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겹쳐지는 부분을 찾으려고 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디로 가야 할까.
'소박한 개인주의'에 대한 생각도 물론이지만, 여성의 사회적 입지와 그에 대한 박완서의 태도, 생각, 그에게 접근하는 사회의 태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얘기해보고 싶어졌다. 특히 요즘 읽은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에서 그가 메트로폴리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었던 바, 가지고 있었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물론 그의 아버지의 태도와 경험까지 넘겨짚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던 데 강경하게 대응했던 것. 그리고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아들이 보여준 편지를 내밀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에피소드가 겹쳐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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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서희가 글귀를 포스트잇에 적어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게 있다.
"적당한 육체노동, 맛있는 식사,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미운 사람 욕하기, 그리고 편한 자세로 좋은 책 읽기는 내가 사는 것을 맛있어할 수 있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낙들이다."
이 말을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또 이해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또 그렇게 되려면 어떤 태도와 시선(이라기보다 눈길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을 가져야 좋을까.
서른 살이 넘으면(곧, 서른 한 살의 나는), 반드시 소박한 개인주의자, 그러면서도 따뜻한 나무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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