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폭력적이다. 장강명의 글은 읽을 때마다 유치하고 폭력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이렇게까지, 그리고 이런 장면까지 다 보여줘야했나 싶을 때도 있다. 이 유치하다는 생각, 폭력적이라는 느낌은 사무치는 현실감각으로부터 온다. 한 문장만 읽어도 곧바로 연상되는 건물, 장소, 풍경. 그의 글은 정말 '지나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누구의 글(소설)보다 생생하게 현실적이다.
이 책은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한 그의 첫 작품이다. 책이 처음 나왔던 2010년과 오늘, 2019년 사회의 모습은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을 찾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회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개인의 삶 역시 그렇게 달라졌을까? 내 경우 2010년과 2019년, 나를 좌절하게 하는 것들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극복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다. 나는 1960년대, 80년대 또, 90년대와 2000, 2010년대를 살아가는 인간을 좌절케 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는 것과 무관하게 인간을 궁극적으로 좌절하게 하는 요소는 달라지지 않으며 어쩌면 그것은 극복될 수 없는 무엇, 굴복해야만 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표백세대'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몇십 년 전을 살던 젊은이에게는 '보다 위대한' 목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사회는 정말로 더 이상 발전할 게 없고 이론적 성장률이 0%인 상태에 도달한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그렇다. 하지만 책 속 표백세대가 남긴 자살선언에서 느낀 모순점으로 이 작은 공감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실패했다고 비춰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자살을 감행한다. 좌절하고 절망해서 삶을 포기한 것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때야말로 진정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버린 상태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인정하고 주위가 타인, 즉 나의 삶에 대해 함부로 상상하거나 판단하고 의심할 수 있는 빌미가 제거된 상태. 이 상태는 사실 스스로는 아무런 가치도 발견할 수 없는, 나아가 가치에 대해 생각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그럴 필요를 제거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야말로 진정한 좌절과 절망의 상태라고 봤다(실제로 소설에서도 세연이 마지막에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러한 인식을 작가님도 갖고 계셨던 게 아닐가 생각해보게 한다).
사회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개인의 사고에는 움직일 여지가 무한히 존재한다. 사회의 모습(외적 모습)이 엄청나게 변화해도 개인을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요소는 똑같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사회와 개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는 있어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대 주도권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사고가 멈춰도 개인의 사고는 무한히 증식하고 끝없이 움직일 수 있다. 어쩌면 개인의 끝없는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한 파장이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굳어버린 사회에 낑겨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 게 표백세대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아서 허옇게 표백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난 그저 그들의 자살선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나란 사람 역시(김연필 시인의 시 <우산>의 구와 비슷하게: "나는 슬픔을 모르고, 모르고 싶고, 모르고 싶은 채로 계속해서 슬픔을 바라보기만 한다.") 좌절, 절망을 모르고, 모르고 싶고, 모르고 싶은 채로 계속해서 그 좌절과 절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 좌절과 절망을 나는 끝없이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고 그것과 언젠가 대면하겠다고 다짐한다. 끝내 무릎을 꿇고 굴복하게 되더라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한 번은 외치고 말겠다. 세연처럼 누군가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세연의 '제자들'처럼 누군가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지도 않은 채 오롯이 나 스스로 생각하고, 그 결과로써 소리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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