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명의 철학자, 수십 권의 철학책을 모두 다 읽어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요한 사상, 주장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또 간략하게나마 그것들을 알고 싶다고 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또 다시 어려움을 마주할 것이다. 또, 일상적으로 내가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지?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면 다시 어려움만 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첫 몇 장을 읽자마자 수박 겉핥기는 커녕 얕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개울에서 두 발을 찰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꼭지가 너무 짧았다.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시 역시 내가 받아들이기에 다소 보수적(가부장적 권위에 물들었다는 의미로)이며 인위적이었다는 점도 몰입과 이해를 방해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이 책은 다른 유명 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자 자신의 목소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느꼈다. 읽으면서도 그렇고 읽고 나서도 어떤 철학자들이 소개되었던가, 그들의 주요 사상이 무엇이었고 여기서 다뤄졌던 그들의 저서는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내 기억에 남은 이 책의 내용은 저자 강신주의 생각뿐이었다.
불만족스러운 느낌을 받으며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한 가지 메시지가 머리에 남았던 건 재밌는 점이다. 다양한 철학자와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 이 책을 읽는다면 실패하겠지만, 한 현대 철학자의 생각과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들어보고 싶다면 성공할 것이다. 작가는 정말 '철학자'답게 일관되고 확고한 자세와 생각을 가진 인물 같다. 매번 들고 있는 예시와 결론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주장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정말 다양한 철학자의 생각을 소개하고 있지만, 어떤 사상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자신의 반응, 생각, 결론이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됐다.
전체적으로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체적인 태도'라고 생각된다. 어떤 철학자의 가르침을 소개하더라도 결국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취한 행동이라면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제목처럼 일상 속에서 '철학이 필요'해지는 순간들마다 어떻게 결정하면 좋을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를 고민한다면 그에 대한 작가의 답은 당신의 의지로 당신이 주체가 되어 선택하세요,가 아닐까 한다.
- 강신주 작가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2016년에 읽은 감정수업이었다. 표지와 소개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다. 하지만 감정수업과 철학이 필요한 시간, 두 권의 책은 구성이 거의 동일하다. 꼭지마다 매우 짧게 저자가 생각하는 일상 속의 예시와 소개하고자 하는 철학자, 그 사람의 책을 연결지어 설명하고자 한다. 의도와 구성은 매우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 구성이 낼 수 있는 효과는 하나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 얼마 전에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Rebel in the rye)를 봤다. 거기에서 샐린저의 첫 번째 글쓰기 스승이자 조언자였던 컬럼비아대 교수 휘트 버넷이 그런 말을 한다.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샐린저에게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를 전달해야 하는데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얘기를 한다. 강신주의 책은 작가의 목소리가 '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이' 들어있다. 차라리 작가의 일관된 인생철학을 중심 주제로 풀면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데에 다양한 철학가들과 그들의 사상을 예시로 들어가며 설명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최원호의 <혼자가 되는 책들>이나 사카이 준코의 <책이 너무 많아>는 읽고 나서는 물론 읽는 중에도 계속해서 읽고 싶은 책, 알고 싶은 작가가 생겨났다. 그만큼 다른 책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고 느낀 책이다; 물론 나에게 그들이 글을 풀고 책을 소개하는 방식이 잘 맞아들었던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 뒷부분에 가면 저자가 라캉의 에크리는 도대체 언제쯤 번역되어 소개될 것인가 하고 말하는데, 최근에 에크리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이 나온지 8년이나 지났으니 그 사이에 좋은 철학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을 것이며, 8년 전 이 책을 접했던 독자들의 독서력은 얼마나 상승했을까 생각하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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