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조각만 남은 냉동실의 블루베리 봉지. 그것을 먹다보면 손 끝에 보라색 물이 들고 그게 그리 우스웠다 했다. 웃기는 애. 재희.
누군가의 일상 속에 익숙해져버린다는 건 어떻게 일어나는 일일까. 어떻게 일어난지 알 수 없는 일들이야말로 진짜 다시는 지워버릴 수 없는, 덜어내버릴 수 없는 무엇이 되는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그애에게 느낀 배신감도, 어쩌면 그 익숙함의 일부였는지 모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 익숙함과 애정. 사랑 속에 들어있던 한 일부.
연애 비슷한 그런 것. 데이트같은 그런 것. 그것과 섹스는 정말 반대되는 것일까. 다른 무엇이고야 만 걸까(아님 그래야만 하는 이유같은 게 있는 걸까). '나'의 이름은 정말 끝에 가서야 단 한 번 나온다. 그것도 그냥 재희가 친근하게 부르느라 짧게 부른 이름의 한 글자이고 말 것 같은, '영'이었던가. 영이랑 섹스를 하고 난 그 남자들은 기어이 영이와 계속 만나려 한다. 영이는 그저 심심하니까 하룻밤 재밌게 놀 친구, 키스하고 섹스할 남자를 찾은 것뿐이었는데. K3의 관을 떠올리며 비로소 '내다 볼 수 없을 만큼의 긴 미래를 상상해왔다'는 걸 깨달았던 건 그때서야 그 미래와 상상의 끝이 내다 보였기 때문인 거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어떤 길 위에 어떤 세상 안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끝이란 게 도무지 내다보이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다보이지 않는 그 먼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모른체 하려든다. 그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뭔가를 이루어 끝나버릴까 봐. 그러면 하염없이 시간이 남을까 두렵고, 또 그냥 걷고걷고 걷다보면, 쉽사리 내가 길 위에 있다는 것 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바로 심심함이다.
마지막에 가서 영은 모든 아름다움은 찰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한창 아름다움을 살고 있는 자는 그 현실을 인지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길고 길었던 아름다움을, 사실은 사라지지 않을 그 아름다움을 영은 종료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재희와의 시간, 냉동실에 블루베리가 떨어지지 않던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갔을 뿐.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에 영에게는 아름다움이 있고 앞으로도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기 때문에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시 돌아보면, 모든 아름다움은 끝이 난 뒤에 인지된다는 말 같다. 모든 게 끝난 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끝없이 매 순간 순간 숙성되기 때문이다. 그 진해지기가 어디까지 갈 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않고 살아간다. 마침내 숙성되기를 마친 아름다움을 꺼내어, 찰나였다, 고 말하면서. 얼려버린 블루베리에 단 맛이 고여있듯이. 냉동실에 넣어둔 말보로 레드가 그 시원함을 품고 있었던 듯이. 하지만 그건 내 혀가, 입술이 바로 지금 느끼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영원히 지속될 기억. 감각. 손 끝에 든 보라색 물처럼 그 살아있는 감각은 우리에게 밴다. 찰나를 영원처럼 품고 사는거다.
6월 27일. 자정 넘어서. 버스에 타서 바로 막 메모에 끄적였던 거 오타를 고치고 뒤에 두어문장 붙여서 바로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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