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다닐 떄 생각했던 게, 서점에 들어가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 있을 때, 아무 고민 없이 책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나는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맞지, 그게 KC다닐 대 했던 생각이었지?
채겡 대한 가치를 매긴다는 거. 일단 사 보고 나서, 아닐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고를 판단해야지. 음식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이해가 쉽고 빠르게 되는 걸, 왜 책이라는 건 그렇게 다르게 여기게 되는 걸까 한다.
지난 번에 과천 MMCA에 가서 전시를 보고 기념품 상점에 들어갔더니 여러 가지 책들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일민미술관에 갔을 때도 많이 봤는데, 그 때는 약간 헌책을 쌓아놓은 느낌이 더 많이 들었고, 사고 싶다거나 눈에 들어오는 책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과천이라는 장소적 특성 때문이었는지 어스름이 내려오는 늦은 오후, 가을이 찾아오던 추운 날씨, 그 계절의 영향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날 이 곳에서 봤던 그 책들은 하나하나가 반짝이며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가 한 권을 샀다. 샛노란 색에 약간 부드러운 촉감이 드는 표지를 가진, 포켓북 사이즈의 이 책이었다. 제목은 "500그루의 레몬 나무". 황포치라는 이름은 마치 한국인인 것 같지만 아니다.
내부는 타이포그래피 서적처럼 큼직한 글씨와 줄간격이 좁은 문단들로 이루어져있었고, 반쪽은 한글 번역본, 뒤집어서 반쪽을 보면 영문으로 되어 있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정말로 그저 끌려서 산 책이었다.
오며가며 읽었다. 대중교통용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 500그루의 레몬나무를 심어 휴경지를 재사용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기록한 일기 같았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지같은 것은 아니다. 예술가 황포치와 그의 주변 사람들, 특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 썼던 일기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끝에 가서는 후원자들에게 보내려던, 그리고 보낸 편지가 나온다.
황포치는 이 아카이브-그래 정말 아카이브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와 함께하는 예술의 의의, 기능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스스로 500그루의 레몬나무를 심는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예술의 기능,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도대체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더군다나 후원을 받았으니) 고민을 아주 많이 한 것 같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주어진 눈 앞의 일, 레몬나무들을 잘 돌보고 길러내는 것에만 신경쓴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벌레도 만나고, 뱀을 보기 싫다는 생각으로 잔디를 바짝 깎기도 한다. 황포치는 이게 과연 예술인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예술이라는 건 그럼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많이 고민하지만, 나는 이 일련의 시간, 레몬나무를 길러내는 동안 그들이 생각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이 진정한 예술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하나의 주제 또는 제목 아래 움직이고 있는데, 그 사람들 각자가 맡은 역할이 다르고 또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목적, 새롭게 배우고 알아가는 사실이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황포치가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경우 그 거대한 유기체란 레몬나무가 자라나는 것, 또 태풍이 불어오고 태풍에 레몬나무가 쓰러지는 것, 레몬 열매가 열리고 레몬주가 만들어져 병에 담기고 초록색 라벨이 붙는 것 모두다.
내가 하필 과천 MMCA에 가서 이 책에 눈길이 끌린 것. 그리고 이 책을 구입하여 그 안에 담긴 문자를 읽고 그 안에 등장한 사람들의 생각을 들었던 것. 그래서 나도 이 레몬나무 프로젝트의 일환이 되었다고, 나를 포함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이 예술을 끝나지 않게, 숨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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