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라는 단어에서 오는 부정적 감정. 그것을 왜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 이 단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낙태라는 것은 하나의 결과다. 어떤 과정이 일어난 뒤 내리는 최종적인 결론이다. 낙태에 대해 논의하려면, 낙태 그 자체가 아니라 낙태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과정을 하나하나 거슬러 오르며 살펴봐야 한다. 낙태는 문제가 아니다.
임신을 중단시킨다는 것, 더 이상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막는다는 것. 그것을 그 밖의 어떤 다른 의미로 볼 수 있는 걸까.
여성의 권리, 여성의 몸, 그 모든 것에 대해 논의의 초점은 맞춰져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책 읽기를 끝마치고 나서 깨닫게 된 것, 그리고 든 생각은 지금까지의 논의는 특히 그 초점이 대부분 잘못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낙태를 합법화시키자고 말하는 운동과 목소리는 낙태가 죄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최종적인 현실이, 결론이 ‘낙태는 죄이고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낙태가 죄인가, 왜 처벌받아야 하는가, 또는 왜 낙태가 죄가 아닌가, 왜 처벌받지 않아야 하는가, 에 대한 논리를 다투기 전에 우리는 왜 낙태가 일어났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오래된 저 주장을 깨부술 수 있다. 저것이 잘못된 생각이며 충분한 논의와 고뇌 없이 만들어진 논리 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고 전달시킬 수 있다.
낙태라는 것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낙태’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 시작을 살펴봐야 한다. 그 원인이 되는 사건은 무엇인가? 왜 낙태라는 것이 생겨났는가? 여러 가지 인구 조절 정책,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이유가 뒤섞인 정치적 배경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왜 낙태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아주 단순화시켜서 거슬러올라가봐야 하며 가장 쉬운 이야기부터 해도 된다. 그래도 될 만큼 이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쉬운 사실이다. 시작해보자.
낙태는 왜 하는가? 또는 낙태란 무엇인가? = 임신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 왜 임신을 중단시키는가? 임신을 중단시키는 상황은 언제인가? 여기에서 질문을 오해한다면 수없이 다양한 상황이 답으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sympathetic한 구체적 실례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단순화시켜서 생각하자고 한 것을 잊지 말자. 임신을 중단하는 것은 언제인가? = 임신을 한 상태일 때다. à 임신은 왜 하게 되는가? =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 성행위는 왜 생기는가? = 남성과 여성이 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하나의 신체행동이다. 우리가 배가 고프면 먹는 것처럼,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처럼, 성욕이 존재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이며, 여기서 나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까지 나온 과정 중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 누가 나쁜 행동을, 잘못을, 죄를 저질렀는가?
낙태는 하면 안 된다. 낙태는 처벌받아야 하며 규제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하지만 아주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면적으로 낙태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유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며 이런 경우에는 가능하고 또 저런 경우에는 불가능하고,와 같이 상황을 분류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든 저런 경우든 낙태라는 것 자체가 변화하는 건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하는 낙태와 저런 경우에 하는 낙태는 모두 동일한 낙태다. 그러므로 상황을 나누고 조건을 붙이는 것은 위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욱 나쁜 행위다.
유럽의 낙태권 운동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읽으면서 낙태권이라는 것을 왜 보장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니 낙태는 어쨌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고,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겪는 사람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는 것이 낙태를 처벌하거나 막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의 가장 큰 요지였다. 어떤 방식으로 금지를 하더라도 낙태를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 사람이 낙태를 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위협받는다. 실제로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다. 왜 뱃속 태아가 더 자라나 온전한 인간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명’이라는 단어를 이유로써 내밀면서 멀쩡한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가?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위험은 제거하기 힘든 위험이 아니다. 너무 간단하게, 깨끗한 환경과 도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제공할 수 있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공되지 않고 있다. 법적으로 규제되고 있고, 규제를 어기면 처벌받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낙태를 하지 않는다. 생명을 경시한다면 낙태뿐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생명과 관련된 가치 판단들)도 쉽게 생각하고 경시할 것이다. 생명 경시를 우려한다면 생명 경시를 막을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고민과 논의를 해야 한다. 낙태만이 생명경시가 아닌데, 왜 낙태만을 생명 경시의 행위로 여기는 것처럼 나는 느껴지는 걸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가, 그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절대로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고 난 생각한다. 의견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견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그 상황에 처한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당사자가 배제된 이유들로만 수립된 의견은 오만이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폭력이다.
정말 놀랐던 것 하나는, 피임조차도 규제하거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피임이라도 해야 임신을 막을 수 있고, 임신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낙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강제로 여성을 임신시키겠다는 논리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온전히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서만 성행위를 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전제가 존재하는 곳이 지금 이 시점, 어디에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모르며, 실제로 낙태를 규제하고 처벌하지만, 그 규제와 처벌이 사라져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들은 이와 같은 전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저자가 루마니아에서 길거리 캠페인에 참여했을 때 마주쳤던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자신은 낙태가 규제되어있었기에 생명을 얻어서 세상에 나왔고,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 수녀의 손에 컸다는 것, 그 사실이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이렇게 자라나 아이를 낳았고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 여성의 말에서 잘못되거나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낙태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녀를 가졌던 여성은 낙태가 처벌 대상이 아니었더라도 아이를 낳았을 수 있다. 아무리 규제와 처벌을 강하게 해도 낙태를 하는 여성이 수천 수만 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렇게 가정할 경우,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정은, 낙태가 처벌 대상이 아니었거나 혹은 처벌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가졌던 여성이 임신을 중단하기로 선택하여 그녀가 생명으로서,온전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인가..? 가정(낙태)이 가정(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존재함)과 가정(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존재함)을 낳고, 비난과 질책이 발생한다. 왜? 왜 꼭 이렇게까지 생각을 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누구도 낙태를 ‘함부로’ 결정하지도 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낙태를 한 여성들은 신체적으로도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자기 몸에 대해 스스로 결정한 것이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여성은 항상 남성에게 존재하지 않는 신체적 변화로 어려움을, 힘듦을 겪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며, 사실 이러한 사실까지 이유로 지금 들먹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얘기를 지우더라도,
낙태는 그 누구도 쉽게 아무렇지 않게 내리는 결정이 아니므로 낙태 이후에도 낙태를 시행한 여성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낳은 아이를 유기하고도 책임의식이나 어떤 새로운 감정,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런데 왜 낙태에 대해서만 태어날 아이의 생명이나 반쪽 짜리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꺼내 죄악시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의사 마리 클로드의 경험과 생각 변화가 너무 간결하면서 공감 간다고 느꼈다. 상대방에 대해 가치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 그 사람의 선택은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어떤 타인에게도 물리적, 정신적 상해나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선에서 내리는 선택이 어떤 맥락에서 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도둑질. 살인. 폭행. 욕설. 이 모든 것들은 상대방에게 물리적 정신적 상해를 입힌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법적으로 또 사회적 도덕관념을 통해 규제하고 처벌하고 있다. 하지만 낙태는 그 누가 그 누구에게. 상해를 가하는 것인가. 위협을 가하는 것인가. 낙태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낙태를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그 여성 본인에게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 여성에게 폭력과 위협, 상해가 가해지는 것인데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가졌다고 한 생각은 책임감 없고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낳게 될 아이가 어떤 핸디캡을 가졌다고 할 때, 내가 계획하여 한 임신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없으면 임신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한 것 말이다. 이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생각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대화와 생각의 고리 안에서 급진적으로 나아간 것 같다고 시인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의 논의로 넘어가 보자.
아기가 태어난 뒤 자라서 성인이 되고, 독립하기까지, 또 사실은 독립한 성인이 된 뒤까지도 인간 사회에서는 가족이라는 구성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모든 개인은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로 묶여있고,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특히 성인이 되지 않은 인간의 경우, 부모가 거의 대부분 그 위치와 자격을 가지게 되는데, 그를 돌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한 명의 인간은 온전히 독립된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보호자의 책임 하에 놓이게 되며, 보호자에게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고, 아이 스스로도 포기하거나 끊어낼 수 없다. 그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긴 수정란이 착상을 할 때부터, 혹은 난자와 정자에서부터 모든 것이 하나의 인간이고 생명이라고 생각할수록, 그 생명에 대한 책임을 부모가 지고 있어야 하므로 부모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그 아이에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하거나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재 사회에서 그러한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 그 아이 스스로 가지는 권리가 있는데 부모라고 해서 왜 판단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반대로 그 질문을 던지고, 아이가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판단은 지금 누가 내리고 있는 것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이에 대해서 사실상, 사회가, 낙태를 반대한다고 하는 목소리가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장을 하는 이들이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여성에 대해 임신과정 전체와 출산 이후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다른 성인이나 그 어떤 자기 자신 외부의 도움이 없어도 되는 상태가 될 때까지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결국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누구인가를 고려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판단은 타인에게 책임을 함부로 지우고 떠넘기는 일이다. 오만한 태도다.
낙태라는 결정은 수정란, 또는 배아뿐 아니라, 임신을 한 여성에 대해서도 내려지는 결정이다. 상황을 반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 없애는 것을 과연 비난해도 되는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처벌해도 되는가에 대해서 어떻게 진행시키면 좋을지를 좀 생각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영화 ‘가버나움’이었다. 나를 낳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했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가버나움. 그의 부모가 만약 피임을 성공적으로 했다면, 또, 아이를 가진 초기에 낙태를 선택했다면 혹시 변화가 있었을까? 그렇게 대입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갑자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낙태를 왜 하는가. 낙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은 어떠한 경우인가. 그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살펴보아지고 논의도어야 할 그 무엇은 낙태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 과정, 그 원인이 되는 어떤 사건 또는 상황이지 낙태라는 결론 자체가 아니다 또한 책임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 반쪽 짜리가 아닌 온전한 하나를 모두 살피고 있는지 겸손한 태도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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