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일기획에 10년 가까이 다니다가 퇴사 후 어머니가 이십년 가까이 운영해오신 김치공장으로 이직했다.

 

이 한 문장으로도 너무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제일기획'이라 하면 제일 잘나간다는 그룹사 삼성의 계열사이며 광고회사로서는 가장 큰 회사로 인식되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이 회사를 숫자 '10'에 가깝게 다녔다니 좀 더 완벽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대기업을 잘 다니다가 자진해서 그만두고 간 곳이 '김치공장'이다. 공장이라면, 컨베이어벨트가 그 회사의 생산품-그게 플라스틱이든 식품이든,을 싣고 흘러가면 그 주위에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이지만 꽤 가깝게 둘러앉아서 생산품을 집어들어 수가공하고 다시 벨트 위에 올려놓기를 반복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망사로 된 모자를 쓰고 장화와 비닐로 된 옷, 앞치마같은 걸 입고 돌아다닐 것 같다. 공장의 위치는 도시와는 거리가 먼 구석. 서울 중심지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면 점심 시간에 근처 맛집에서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도 사들고 올텐데.

이 책의 작가님 외에도 '삼성 다니다 그만뒀대'라고 알려진 작은 가게의 사장님을 떠올려본다.

왜 우리는 이들에게 관심이 갈까? 아마 '삼성'이라고 하면 몸이 고생하지 않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텐데. 사회에서 꽤나 '갑'의 위치에 있을 텐데.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공부도 엄청 잘해야했을 텐데. 그런데, 그 환경과 조건을 버리고 어딜 갔다는 거지? 지금 그 자리에서도 그만큼이 충족되는 걸까? 혹은 지금 그만두고 그 자리로 옮겨가도 될만큼 경제적으로 준비가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김치공장으로 떠난 원재씨는 왜 회사를 떠난 걸까? 회사가 너무나도 힘들거나 떠나지 않고는 못 견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이제 회사를 떠나도 될만큼 경제적으로 안정된 것도 아니다(그는 퇴직금을 충분히 홍보되지 못하고 끝난 유튜브 영상 광고 제작에 모두 써버렸다...). 어머니도 어느 날은 '회사 잘 다니던 너를 왜 불러서'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가 어머니의 공장으로 간 이유는 이것 같다.

"회사는 누군가의 자아를 이루는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자존감을 단단히 지탱할 수는 있다."

김치공장이 뭐가 더 좋아서, 나아서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간 것도, 제일기획이 뭐가 더 안 좋아서, 나빠서같은 이유가 있어 떠난 것도 아니다. 어느 직장에 다니든 그는 동료들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하며 '자존감'을 찾으려고 애썼을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원재씨의 어머니가 세우신 김치공장이 어딘지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포스터 광고(!)가 실려있어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ㅎㅎ 참말로 이 책이 최고의 광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원들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탱할 수 있는 회사, 그게 정말 최고의 회사구나. 그게 정말 성공한 삶이겠구나, 라는 걸 깨닫게 해준 원재씨, 그리고 도미솔식품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Posted by solleap
,
728x90

1997년에 출간된 제임스 홀리스의 책이다. 2023년에 읽어도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더욱 더 중요한 내용이다. 제목처럼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기보다 '나'를 잘 인식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사실 이것이 곧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고 말도 되게 이해하기 쉽게 흘러간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한 문장씩 읽어나가면서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툭툭 떠올라 빠르게 다음 문장을 읽는 걸 방해하기도 했고, 또 어떤 문장을 읽을 땐 스스로 내 모습을 돌아보느라고 몇 분씩 머무르기도 했다.

책 내용은 관계의 종류에 따라서 챕터로 나뉘어있다. 원가족과의 관계, 커플(연인관계)이나 종교(신과의 관계)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오히려 관계맺기와 사랑이라는 것이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더 깨닫게 됐다.

 

제임스 홀리스는 '관계'라는 주제를 융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른 유명한 심리학 이론(주로 프로이트의)과 함께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심리학 이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가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에 가장 중요하게 남은 것은 '투사'라는 말이었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Eden project'가 바로 이 '투사'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모든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완벽하고 완전한 무엇, 에덴동산을 찾거나 이루는 걸 무의식적으로 목표한다. 연인관계는 물론이고 선택할 수 없는 원가족에서도 우리는 에덴을 꿈꾸고 있었고,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대체로 완벽한 완전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순적인 것은 이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번 우리는 완벽한 관계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불만과 어려움을 겪을까? 최종적으로 완벽하지 못함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앞 단계, 즉 우리가 '에덴'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서라고 이 책은 설명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문제, 불만만을 바라본다. 그 불만은 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 속에 있다. 관계를 함께 이루는 상대방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얘기로, 상대를 바꾸어야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결국 '에덴'을 추구하는 나의 목표는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시선을 바꿔서 내가 어떤 모습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있는지, 그보다 또 앞단계로서 내가 상대방에게 '투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바라봐야 한다.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에덴'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받아들이면(이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이걸 알고 있다.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만 잊어버릴 뿐.)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나 역시 지난  관계들과 현재 내 상황을 얕게나마 돌아보며 관계 안에서 내가 '투사'를 했던 장면들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내가 불만과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들을 찬찬히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다. 단번에 되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보니 책을 읽다가 잠깐씩 멈춰서게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도 말한다. 이같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고(뤄진예의 말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는 이 책에서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영혼'을 찾는 일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담사들이(1997년인데!) 영혼을 찾는 일을 안 하는 것뿐 아니라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잊고 있다는 걸 지적한다. 아무래도 이것은 1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되기는 커녕 더욱 심해진 게 아닌가 싶다. 마음 건강이다, 명상이다 여러 가지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사람들은 진정한 '나 알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더욱 의문스럽다. 자기위안을 하면서 스스로 진짜 마음 속에 숨어있는 콤플렉스나 이 책에서 말하는 '아니마'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확인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덮을 수 있을지가 발달한 것 같다. 물론 그 방법이 어쩌면 더 나은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진짜 필요한 해답을 찾았다, 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 자신에게 너무 침잠해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어떤 보호막을 잘 쌓는 것도 아니라 관계에 있어 문제는 항상 같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원인이 '투사'와 '완전체(에덴동산)'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본성이라는 걸 찾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두고두고 내가 '투사'라는 말을 잊지 않고 자주 떠올리게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싶은 책이다.

Posted by solleap
,
728x90

제목부터 호기심이 확 인다. 이게 적절한 이유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두껍지 않아서 표제의 중편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소설이 정말 많이 짧았기 때문이다. 판형이 조금 크다 해도, 서너페이지만에 끝나는 소설도 있다. 30여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있는 이 책은 정말이지, 재밌다.

모두 SF소설인 것 같으면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또 배경이 되는 국가도 한국(조선), 일본, 미국, 유럽의 어느 나라까지 종횡무진이다. 조금만 더 자세히 써주지, 조금만 더 길게 늘여서 써보시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냐 이렇게나 짧게 썼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 그 아이디어 소재가 모두 일상에서 눈에 띄는 것인데 이렇게나 재미있게(짧지만) 상상을 하다니! 하고 읽게 된다. 겨우 몇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인데도 반전이 있고, 반전이 조금은 예상되더라도 재미가 있다.

또 이야기들마다 석아산 작가가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이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 주위 사람과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Posted by solleap
,
728x90

표지에 '3만명'의 삶을 변화시킨 중국의 상담가 뤄진웨가 쓴 책이라고 되어있어서 시작할 때부터 기대가 됐다. 안 그래도 마음이 많이 힘들고 나에게 매번 불행한 일만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다 결국 내 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상담을 받고 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해소가 좀 되고, 다음 번에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럴 때 과거에 상담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좀 더 빠르게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직접 상담을 받으러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다. 2022년 11월에 우리나라에 출판되었고, 원작도 2020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중국 사회보다 현재 여성으로서 한국에 살고 있는 나의 삶이 더 많이 열려있고 현대적(?)이 된 것일까(사실 '현대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뤄진웨는 책에서 내담자들의 사례를 곁들여 불행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세를 조언해주고 있는데, 조언과 사례에 대한 평가(?) 내지는 뤄진웨의 의견이 하나같이, 그리고 점점 더 내담자 또는 불행한 사람을 탓하고 비난한느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기만 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찾고 높은 자아존재감, 자신감같은 걸 가질 수 있다면 마음이 더 튼튼해지고 거기에서 행복의 씨앗이 자라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하지 말라고, 변화의 시작은 내 안에서밖에 시작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구시대적인가. 과거에는 상담을 하거나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존감을 기르라고, 자신이 혹시 자존감이 너무 낮은 건 아닐지, 주위에 너무 의지하기만 하는 건 아닐지 살펴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 성장의 시대는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고, 내가 바뀌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자칫하다간 자기를 비하하거나 공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뤄진웨의 의견, 태도 그리고 이 책에서 하는 말은 모두 이런 구시대적인 태도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이 책에 소개되는 내담자들은 다 여자이고, 결혼 후에 힘들어하는 아내가 많다. 이 점 역시 이 책과 뤄진웨의 이야기가 더욱 구시대적으로 보이게 한다.

나는 자기 혼자 노력하고 변화해서 성공하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어디나 주위에 악당이 있다. 그리고 변화해야 할 대상은 악당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악당에게 에너지를 지나치게 많이 뺴앗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고-그 방법 중 하나가 나의 태도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태도를 장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악당은 우리가 절대 변화시키기가 힘들고, 그 경우 벗어나는 것만이 방법이지만 놀랍게도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고 불가능할 지경인 때가 많다. 상담사를 비롯한 주위의 '도움의 손길'은 이런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당신이 변화하면 됩니다', '스스로 강해지고 벗어나세요'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은 매우 읽기 쉽게 되어있다. 일곱개의 큰 주제 각각이 다섯 개의 글로 구성되어있고 각각의 글은 도입과 세 개의 꼭지, 마지막에 '치유노트'라는 이름의 두 세 문장짜리 요약 정리로 구성되어있어서 정말 빠르게 읽을 수 있다. 나는 글이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해서 꾸역꾸역거리며 느리게 읽었지만. 그나마 "감수성"이라는 능력을 주제삼은 부분은 내용이 괜찮았다. 안좋은 감정이라고 회피,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다 마주하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지를 모두 다 솔직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데 엄청난 용기, 그리고 시간도 필요한데-주위의 악당이 이러한 시간을 빼앗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러한 인식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저자는 부르고 있다. 저자가 '감수성'이라 칭한 이런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고 나도 생각하고, 갖추는 데에도, 또 실제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역시나 또, 이 능력을 갖추고 사용하는 이유와 목적 역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지 나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변화시키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불행하고 슬프지만, 자신이 불행하고 슬퍼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시대와 나라에 살고 있다. 어떤 얘기든 사람마다 다르게 도움이 될 수도 방해가 될 수도 있는데, 언제나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마음에 굳게 가지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더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Posted by solleap
,
728x90

<이방인>의 말투가 원래 이렇게 단순하고 무심했었나, 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돌아와서도, 이 모든 이야기를 감옥에서 마지막날을 보내며 되돌아보는 주인공의 말투는 너무나도 무심하다. 특별히 퉁명스럽거나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현대지성에서 이번에 펴낸 책의 말투가 너무나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느꼈다.

 

2013년에 썼던 독후감(https://solleap.tistory.com/329)을 다시 읽어본다.

 <이방인>을 처음 읽었던 때다. 그 유명한 첫 문장에 대한 놀라움이나 감상보다 책의 뒤에 실려있던 해설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책을 읽은 지 딱 10년이 된 거다. 그 사이 내가 달라져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책은 번역가가 달랐고, 그것이 현대지성에서 펴낸 이번 책을 읽어보기를 바라고 받아서도 기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서로 다른 번역가가 옮긴 버전으로 두 권 한 번에 빌려와 읽었던 적이 있다. 내용은 분명 동일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말투가 느껴져 재미있었다. 그냥 슥슥 읽으면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 읽은 <다정한 서술자>에서 올가 토카르추크가 말했듯 번역은 완전히 새롭게 이야기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의 앞쪽에 번역자 유기환님이 접속사 '그리고'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et'가 많이 쓰였고, 문장을 다듬으려 하기보다 카뮈가 썼던 원문의 맛을 그대로 살려서 옮기려고 많이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문장이 길다거나 중문이다,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이 정말 간결하다, 뫼르소의 짤막짤막하고 단순하게 사고하는 방식이 정말 잘 드러난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모든 일을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 연관을 짓고, 인과관계를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가 희한한 꿈도 많이 꾸는 것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많은 일이 그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며,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는' 일들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게 아니다. 문장 안에서 '그리고'라는 말이 많이 쓰였더라도(내가 그렇다고 많이 못 느꼈고 기억에 남지 않았기에) 모두 서로 연관이 없고, 무관한 것들이라서 '그리고'로 연결된 것이며 아주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어버린다.

 

이번에 읽은 판에도 맨 뒤에 번역자의 해설이 실려있다. 유기환님은 카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학자인데,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사실 이 해제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었다. 특히 법정 장면에 대한 부분이다.

법정에서 뫼르소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그들이 내린 결론 역시 자신에 대한 것인데 모든 것이 자신을 제외하고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고 만 것인데 이는 절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하여진 것이다. 시종일관 세상의 대부분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었던 뫼르소가 이때는 무엇인가가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이방인으로 '처리당했다'는 걸 느낀 거라고 난 생각했다. 물론 스스로 이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투나 태도 변화가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제가 감옥에 면담을 왔을 때에도 화를 내고 만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에 대해 자신이 얘기하고 결정해야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라는 걸 뫼르소는 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기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은 외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인데 이 세상은 너무나도 그렇게-외부에서 왈가왈부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뫼르소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에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고, 그것도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된 것인데, 그 시간마저 또다른 타인이 와서 뺏고 있으니 흥분하여 그를 당장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3년에 읽었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때 쓴 독후감을 읽어보면 뫼르소의 태도는 끝날까지 상관없다, 무관심하다,는 걸로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뫼르소의 태도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무심해보이는 태도의 원인이 마음 속 깊숙이 있었고, 그것을 깨달은 기분이다. 카뮈가 이런 모습의 주인공을 그려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전에 읽었던 다른 버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과연 내가 달라져서인 것인지, 정말 번역이 달라져서인 것일지 궁금하다.

Posted by sollea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