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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렇게 아이들 가까이에서 세상을 살펴볼 수 있을까. 김중미 작가는 참 놀랍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은지 20년이 지났다. 그때 그 이야기가 아무 이질감없이 읽혔던 까닭을 지금에야 알게 된다.

느티나무 홍규목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책은 진지하지만 소박하고 귀엽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옆에서 들리는 듯하고, 도깨비같은(사실 도깨비가 맞는지도 모를) 느티샘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기보다 친근하고 따스하기만 하다.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숨기거나 도망다니지 않고, 찾는 이에게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느티샘. 그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오래 전 마을마다 한 그루씩은 있던 커다란 당산목, 느티나무 그 자체다.

이 이야기가 더 멋진 이유는 '느티나무 수호대'인 홍규목을 지키려는 대포읍 아이들의 노력만을 그리고 있지 않아서다. '레인보우 크루'라는 댄스팀과 도훈이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레인보우 크루 2기'는 결국 댄스대회에 나가지 않는다. 홍규목에 대해서도 천연기념물이 되거나 명확하게 그를 영원히 보호한다는 정책이 마련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를 한다. 아이들은 느티샘의 기억 속에서 느티샘, 그러니까 홍규목을 지키는 것보다 자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홍규목 안의 공간과 자신들을 돌봐줄 느티샘의 존재 자체보다도 '환대'였으며, 그것은 자신들에게만 부족하고 필요했던 게 아니라 이 세상,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자연을 외면하고 환대하지 않게 변한 인간 사회와 그 안에서 또다시 환대받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이 이야기를 보고서야 떠올린다. 서로를 환대하고 지켜주는 일은 그리 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만 생각하고 서로를 미워했을까. 이유가 있든 없든 쉽게 외면하고 경계선을 그어온 나 자신의 모습부터 돌아보게 됐다. 홍규목의 말처럼 혼자서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서로 도와주고 보살펴야 하며, 특히 어린 생명들에게는 가르침과 사랑, 그러니까 환대가 더 많이 필요하다. 지금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얘기한다. 이것이 착각이라는 걸, 우리가 얼마나 많은 환대와 관심, 도움을 받고 지금까지 자라왔던가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만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내가 잘 살아가야하는 이유 역시 내가 이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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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쉬룩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수메르어로 '상자'를 뜻한다는 이 말은 소설에서 기억 속에 숨겨진 행복하고 편안하기만 한 곳을 가리킨다. 그곳에서는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만 있다.

표제작인 천선란의 쿠쉬룩만 아니라, 나머지 이야기도 모두 쿠쉬룩을 찾는 이야기였다. 서윤빈의 이야기 속 '연화'도, 서혜듬의 '영'도, 설재인의 '수최', 육선민의 이야기 속 엄마와 이혜오의 '나(윤영)', 천선란의 '엔릴'과 최의택의 이야기 속 '샤샤 (또는 아리엘)'도,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편안하고 싶어한다. 이들을 움직이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이 많은 사람은 얼핏 겉으로 잘 드러날 것 같다. 하지만 이 등장인물들은 외적으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고립되어있어 보이는 이들이다.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고 싶다거나 주겠다고 겉으로 표현하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실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이들이 사랑을 그래서 얻었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얘기는 사실 없었지만 ,그 마음은 누가 줄 수 있는 것도,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쓰거나 고난을 겪는다기보다 사실, 사랑을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거나 드러내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사랑을 하고(받고) 싶어! 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편안함과 사랑을 찾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보면서 마냥 슬프거나 안타까운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왜 우리는 굳이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만 떠올랐다. 우연과 반복이 겹쳐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 사랑 아닐까, 싶은데 왜 사랑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힘겹고 어려워야 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사랑을 하고, 드러내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세상이 다 잘못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지구를 잊고 화성에 가짜 지구를 만들어낸 <돌아오지 않는다>의 세상처럼,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가짜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 속으로 '증발'해버린 <쿠쉬룩> 속 사람들처럼, 언제고 떠난 적 없었던 '영'처럼, 그 자리에 자연스럽고 솔직한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 방법을 오히려 다 잊어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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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씨가 특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양평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나도 문호리 리버마켓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가 그리는 그림을 더 보고 싶어서다.

이 책은 은혜씨의 그림뿐 아니라 짧은 시도 많이 실려있다. 시가 하나같이 예쁘고 따뜻하다. 아픈 마음도 가끔 담겨있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고 웃으려는 은혜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성의 얼굴 옆에는 "예쁘시는"이란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다. 은혜씨는 사람을 참 기분좋게 해주는 이 같다.

그의 그림은 정말 세밀하다.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 그런데, 그 그림의 표정이 하나같이 편안하고 솔직해보이는 데는 은혜씨의 힘이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거다. 바로, 그림이 완성되길 기다리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은혜씨가 그린 얼굴들은 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다.

사람은 자신을 볼 때 가장 솔직할 거다. 상대방-그러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짐작하고 생각하고 계산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자신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볼 때 가장 두려움이 없고 솔직할 수밖에 없다. 은혜씨의 그림 속 얼굴은 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는 솔직한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지을 수 있게 만드는 은혜씨의 힘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은혜씨는 그걸 알까?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다른 이들이 부러워 자기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은혜씨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림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도 그래서 그에게 내 얼굴을 보이고 싶다. 내가 나를 보는 얼굴을, 나도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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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쯤인가 성곡미술관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전을 본 적이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마크 리부같이 유명한 사진작가들의 전시를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멋진 사진이 아니었다. 예술적이거나 이런 게 잘 찍은 사진인거야,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사진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고, 거울같은 데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도 있었다. 어디서 누굴 찍은 것이든 그 시선이 몰래 살짝 찍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사진 속 사람들과 장면이 사실적이고 생생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사진 속 그 길에, 거울 앞에 서서 같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진작가나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기보다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살아가는 그 시간들이 사진으로 남은 것뿐이었다.

 

이 책을 보고 그때 사진전에서 찍었던 한 장의 사진을 찾으려고 외장하드며 SNS, 블로그를 모두 다시 열어봤다. 어딘가에 찍어서 남겨둔 것 같았던 그 사진전의 포스터는 비비안마이어의 코쯤부터 허리께까지가 찍힌 사진으로, 사진 속 입매는 무표정하고 손에는 그의 롤라이플렉스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그 사진은 결국 찾지 못했다. 아마 삭제했는지도 모른다.

비비안 마이어는 "유모"라고 불렸다. 그 전시에서도 비비안 마이어를 유모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오래 직업삼은 것이 유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영화나 책같은 데서 자주 접하던 유모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그는 유모라고 불렸지만, 유모는 아니었고 유모처럼 사랑받은 사람이었다.

 

사실 이 책에 사진은 몇 장 없다. 사진이 궁금해서 책을 펼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사진을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상태에서 보게 되면 이게 무슨 내용이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책이 그의 삶을 시간순서대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의 사진을 접해봤다면, 이 책에 실린 그림을 보면서 아 이게 그 사진인가?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 그 사진 뒤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을 수 있겠다, 라며 웃음지을 것이다. 내가 그랬고, 작가 파울리나 스푸체스가 그랬던 것 같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이 자꾸만 내가 그 사진 속 시간과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푸체스는 마이어의 사진을 보고 그 장면 속 이야기를 몇 컷의 그림으로 그려냈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 대해서 남은 설명이나 그의 삶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남은 것이 없다고 알고 있다. 이 책도 픽션이라고 뒷면에 분명히 써있다. 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는 정말 현실같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수채화처럼 번지는 듯한 색과 표정이 드러날 것 같으면서 무표정한 것 같기도 한 인물들의 얼굴이 참 매력적이라고 느꼈다.비비안 마이어의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와 그림들이었다.

 

어쩌면 요즘의 '스냅사진'이나 '스트리트포토'의 시초가 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왜 그 사진에서 그토록 눈을 뗄 수 없었는지 이 책을 보면서 좀 알 것 같았다. 그 사진을 찍는 마이어의 마음, 이야기, 그리고 삶을 좀 더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좋은 그림이었고 좋은 책이었다.

 

(진심으로, 이런 책을 서평단 신청해서 공짜로 받다니...... 진짜 내게 온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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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솔직하게 죽음을 다룬 작품, 이라고 했다. 세 편의 소설 모두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나 태도가 모두 다르다.
표제작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알 수 없는 질병으로 통증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시선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바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다. 첫 장은 이반 일리치가 죽어 그의 장례식을 방문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의 시선이었다가, 둘째 장부터 이반 일리치가 죽기 전부터의 삶이 시작된다. 이런 구성때문에 이반 일리치에게 지나치게 이입되지 않고 외부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그의 죽음을 살펴볼 준비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몰라'였다. 어떤 명확한 병을 진단받으면 주위에서도 그 사람의 통증이나 괴로움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통증을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명확한 원인을 모른다. 의사도 여럿 만났지만 그 중에서 명확한 병을 진단해주는 이도 없다. 이런 이반 일리치의 마음과 상황을 정말 이렇게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아파본 경험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오랫동안 아팠고, 최근에도 오랫동안 아팠는데, 병원을 가고 약을 먹는다고 이러한 통증과 괴로움이 가시는 것이 아니라서 더 힘들다. 통증과 괴로움, 불편함 따위를 오랜 시간-그러니까 개월이 넘어가는 단위의 시간 동안 느끼게 되면 주위 사람들도 지친다. 지치는 가장 큰 이유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서 이반 일리치는 내가 떠남(죽음)으로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 는 얘기를 한다. 이 말이 얼마나 슬픈가. 아픈 그는 이해받지 못했다. 시종일관 옆에서 위로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지금의 그 아픔과 통증을 이해하고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기만하고 속으로 다르게 생각하며 불쾌해했다. 이러한 것은 숨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 사람이 뭘 알겠어, 라는 태도를 더해 아픈 사람을 한층 외롭게 만든다.
이 소설은 나에게 있어 단순히 평생을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품위'를 유지하며 잘 살아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알 수 없는 통증을 얻게 되고 그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 알 수 없는 질병과 통증이라는 것을 안고 있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이렇게나 잘 묘사한 이야기를 여태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 나아가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보다도, 그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어야 하는 사람의 주변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병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주인과 일꾼>은 좀 다르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결국엔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서(라도) 주위를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피할 수 없이 죽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다운 삶을 살고 주변에 사랑과 친절을 베푼다면 내 사랑과 친절을 건네받은 사람 안에 나는 죽어서도 남게 되는 것이다. 또 항상 그런 좋은 모습으로 살아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내 모습이 나빴다는 것을 깨닫고 늦게라도 뉘우치고 가능한 때에 베풀면 되니, 나는 이미 글렀어 라거나 난 원래 그래, 같은 말은 변명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사실 <세 죽음>은 가장 짧기도 했고, 단편적으로 세 개의 죽음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서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죽음에 대해서 그 대상이 인간이든 자연이든, 병들거나 나이든 자든 건강하고 젊은 자든 가리지 않고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도 약한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일이다. 죽음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며, 사실 삶이라는 긴 선의 끝 점이나 마찬가지이고 삶과 분리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어려서부터 가족의 죽음을 많이 겪었고 스스로도 우울함을 많이 느끼다 죽었다고 하는데, 비단 그래서 그가 이렇게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도 역시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곧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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