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

敖번 국도/영화 2024. 12. 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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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기억하기 위해 남긴 키워드: 광화문, 담배, 알고 보면 다 별 거 아닌.

그리고 문장은, ‘한형일의 기타를 듣기 좋은, 너무 이른 초봄’.

빨강, 초록, 파랑으로 변하는 PPT 슬라이드 같은 컷에 아 이거 옴니버스 단편영화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짧은 영화이긴 한데, 정말로 더 짧게 느껴져버린다. 이 컷들 때문에.

괜히 아쉬운 소릴 해보자면, 왜 길게 하나로 이어지는 장편을 만들기는 어려울까? <최악의 하루>같이 하루를 그리는 영화도 있는데. 라고 투덜거려본다.

등장하는 두 사람이 과거에 연인 관계였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남성과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정하게 되는 뻔한 생각은 아닐런지. 그도 그녀도 결국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기도 했으니까 더욱 그렇다. 남자와 여자, 라고 하면 연인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썸 같은 관계를 기대하기만 하지 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확장해서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광고용 팸플릿에 박혀 있는 여러 가지 평 중에 비포 시리즈에 보내는 답가라는 문구도 있었는데, 영화를 보기 전엔 그 문구 때문에 기대를 했지만,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과연?’이었다. 두 남녀의, 세 가지 시간에서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밖에 나는 유사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본 날 낮에 광화문에 다녀와서였는지도 모르겠으나, 광화문에서 서울극장(지금은 서울아트시네마) 사이를 잇는 그 청계천가라는 배경 자체에 나는 관심이 더 많이 갔다. 인물이나 대사보다도 배경 자체에 관심이 갔다는 건, 아쉽지만 인물의 매력이 쪼금 부족했던 건 아닐까(비포시리즈와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두 인물의 이름이 안 나왔던가.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나왔던 것만 같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시네토크 장면에서 화면에 나온다. 물론 나는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만큼 나는 이 영화에서 인물의 무게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인물의 무게를 아주 무겁게 느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고, 어떠하며 어떨 것인지에 더 많이 집중했던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고, 또 광화문 근방에 많이 다녔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 궁금했다. 토론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면 외국인들이 많이 봤을 텐데, 이미 광화문광장과 이순신 동상이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이나 에펠탑, 세느강처럼 어떤 상징적인 관광지가 되어버린 건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였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내게 인물보다 장소, 배경이 굉장한 역할을 하는 영화였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가 닿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광화문뿐 아니라, 서울극장과 청계천가를 지나는 버스에 대해서도 나는 추억이 있다. 이십대에 시사회나 예매권 이벤트에 응모를 많이 해서 영화를 한참 보러 다닌 탓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운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서울극장이 없어진 건 사실이고 영화에서도 이 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시네토크가 주요 사건인데, 나 역시 이곳에서 정말 좋았던 영화 시사회를 본 기억이 있어 마음이 이상했다. 서울극장뿐 아니라, 올해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도 다시 떠올랐고. 마침 두 번째 미망(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에서, 인물들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청계천에는 연등이 매달려있는데 나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이 매달려있던 즈음에 버스를 타고 청계천을 지났던 일이 있어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나에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배경이 엄청나게 많은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사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크게 중요하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이러한 생각 인물간의 관계나 그들이 하는 말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건 더 굳혀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손님이 타지 않은(남자 주인공이 내려버린) 버스가 계속해서 운행하고, 장기하의 노래가 나온다. 마치 이 노래 가사가 이 영화를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알고 보면 다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왼손잡이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만 오른손에 칼집을 들고 있든, 그게 왜이든, 동상이 이전을 할 것이든 말든, 내가 배우자는 없지만 아이가 있든 말든, 나와 네가 이전에 어떤 관계였든, 다 별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12시와 12), 그게 같은 12시인지 다른 12시인지 알 수 없고, 왠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장기하의 노래 <별거 아니라고>가 나오는 게 아주 좋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미망: 작은 바람은 왜 나온 것이었을까.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별 게 아니길 바라는, 그런 우리의 바람을 겹쳐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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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진짜,

"장기하씨 똑똑하네"
"이 책 쓰면서 스스로에 대해서까지 이해를 넓혔겠다"

 

그뿐이었다.

솔직한 얘기고, 주관이 꽤 분명한 사람이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작은 것들을 부러 분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논리적 사고가 꽤나 자연스러워서 거부감이 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다만 책의 초반에 담긴 글들과 후반에 담긴 글에서 얘기하는 내용이 좀 달라지고, 또 감성적인 글은 전--혀 아니라서 감동을 받거나 공감이 되거나 하지는 전--혀 안았다. 글 안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얘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서 정말로 와 장기하씨는 참 똑똑하네. 그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에 대한 이해까지 했네. 하고 말았다.

 

출판사는 문학동네.

책 많이 파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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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는 이 책이 별로라고 했다. 너무나도 단순한 그림과 단순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듯하다. 어떻게 이런 책이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는 거지? - 그런데 나는 이 책이 참 좋았다.
젊은 여성(그것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이 청소일을 한다는 게 낯설지 않은 한국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엄마가 직접 청소업체를 운영하고 계셔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가 만화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보여주고 있듯이 '벌이가 꽤 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전에 회사를 한 곳 다니다가 그만둔 뒤 재취업에 실패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짜 다른 점은,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한다.
작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매우 의식한다. 그 의식을 떨칠 수 없어서 쉽지 않아한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일이 즐거워보인다는 게 참 멋있었다. 어머니의 반응들이 귀엽고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 약간의 긍정적이고 가벼운 마음, 실용적인 마음이 작가님에게도 있는 것 같아보였다.

O가 말한 것처럼 그림이 아주 예쁘거나 대단하진 않다. 그냥 연필로 쓱쓱 찍찍 그은 선으로 된 그림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 간단함이, 사람들과 상황을 잘 구분지어주어서 나는 깔끔하고 좋았다.
그리고 청소일을 하면서 겪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들, 이 아니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님의 생각 - 내가 왜 청소일을 하게 됐는지, 청소일을 하면서 항상 하고 있는그 한 가지 생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어렵다, 그 시선은 어렵다, 나는 내가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어렵다, 하지만 생계유지에 꽤 괜찮다. 나는 계속한다. 계속한다 청소를, 그리고 그림 일을 - 이 책을 통해서 더욱.
이 일관된 생각이 이 책을 좋은 책으로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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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표지에 써있던 추천사를 보며 아! 했다. 너무 공감이 되어서였다. 명랑한 은둔자라는 제목이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었다는 게 너무 귀엽기도 하고 마음에 들기도 했다. 혼자 있고 싶고, 숨어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우울한 것이 아니고(물론 우울하기도 하다), 명랑한 기분이라는 것이 너무나 지금을 살아가는 내 또래, 내 주변의 여자사람에게 필요한 인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프기 전보다는 아프고 난 후의)내 모습이 투영되기도 했고.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에서 작가가 폐암으로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보고 많이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오래 살아봤자 뭐해, 라는 말이 아니라 그녀는 인생을 충분히 잘 살다가 갔을 거라는 왠지 모를 믿음이 있어서 죽음이 슬프지 않게 느껴졌을 뿐이다.

짤막한 글들은 모두 90년대에 쓰인 것이었지만, 요즘의 우리가 하는 말과 생각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고 시대적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왜 요즘 이런 얘기가 더 많이 나와야하는데 없을까? 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사회에서 똑똑하고 엘리트로서 여겨질법한 여성이고 미국에서 백인이고 금발이며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을 가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는 걸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며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던 저자의 경험은 드라마틱하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작가가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대단하거나 중독에 빠져있을 때의 모습이 어떻다, 라는 것보다 그에서 벗어난 지금(글을 쓰던 시점)에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상태로서 얻고자 했던 게 무엇이고 벗어날 수 있게 했던 생각은 무엇일까, 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잘 알아차렸다는 게 굉장히 멋있었다. 이러한 시선과 태도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전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좋았다.
물론 나는 거식증이나 알코올 중독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자신을 끔찍하게 옥죈다고 여겨질 정도로 상황을 통제하려 들거나 자신을 압박하고 규칙 속에서 살아가려 하는 행동과 생각은 워낙 많이 했기에 쉽게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결혼하지 않았던 작가는 삶의 마지막에 가까워서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긴 했지만, 강아지 한 마리를 돌보며 이웃들, 여자 친구들과 느슨하지만 속깊은 친구관계를 삶에서 이어갔다. 혼자서 계속 잘 살아가려면 친구들-나를 이해해주고, 내가 이해하는-과 가까이에 모여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말을 거의 매일 하는 요즘, 나는 이게 매우 부럽긴 했는데, 작가가 이 관계들로부터 엄청난 삶의 에너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명랑한 '은둔자'였고, 이웃들에게서 파티에 오지도, 자기 집에 이웃을 초대하거나 담장을 사이에 두고 혹은 길에서 이웃과 수다를 떨지 않아 아니꼬운 눈길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성애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 집을 사는 것과 같이 정형화된 시간순서의 삶을 따라가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고 또 강요하기도 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명랑한' '은둔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우며 대단한 일인지 이해받기 어렵지만,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험이나 조건, 배경 등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 내 꿈은 명랑한 은둔자가 되는 것에 가까웠구나, 라고 분명 생각하리라 다. 자신과 환경을 통제하려 하고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려는 것. 내 주변에서 이런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친구들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해서 친구들에게도 매우매우, 나누고 싶었고, 우리가 이대로 은둔하며 살아가도 괜찮고, 충분히 휴식하고 나를 충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결과로서 우리가 서로 잘 지내고 안전해질 수 있다, 라는 자신감과 명랑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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