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에서 두 번째 해외결연 아동에 대한 후원이 종료됐다. 아동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상황이 오랫동안 좋지 않아 아동에 대한 일대일 결연사업을 더 이상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이유다. 해당 국가에 대해서는 긴급구호 형태로 지원이 계속 이어진다고 안내받았다.
사실 해외결연이라는 형태의 후원은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아동의 개인 정보를 지키고 사생활을 보호하며 장기적으로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이유로 세이브더칠드런은 1:1 결연 대신 마을후원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이 프로그램이 1:1 해외결연으로 변경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첫 문장에서 말했듯 결연후원이 종료된 건 두 번째다.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이유로 인해 결연이 종료된 두 번째 A아동과 달리 첫 번째 A아동(공교롭게도 두 아동 다 A로 시작한다)과의 결연은 공개할 수 없는(혹은 세이브더칠드런 측에서도 모르는?) 이유로 종료됐다. 가능성 있는 이유로는 아동의 조혼이나 이사 등이 있다,는 정도로만 안내받았다.
이유가 어찌됐든 결연 종료는 매우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종료 사실을 통보받는다. 전화를 받는 시점이 결연이 종료되는 시점이며 선택이나 마음의 준비, 정리할 시간, 마지막 인사같은 걸 할 기회는 없다.
이런 게 아쉽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물론 첫 번째에는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 결연이 종료되었다고 하길래 좀 당황스럽긴 했다. 그래도 혹시나 내가 마음을 쓰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느낌이라거나 허무함같은 걸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두 번이나 겪어서라기보다, 내 성격 탓이다(나는 아동과 지나친 유대관계-사실상 진실한 유대를 쌓기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를 권장하지 않는 세이브더칠드런의 1:1 결연 방식이 마음에 드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결연을 통한 후원이 중단된 해당 아동에 대한 지원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 A아동의 경우 결연 종료의 이유가 거주지 이동으로 추측되었는데, 그렇다면 더 이상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세이브더칠드런은 현재 1:1 결연 형태로 해외 아동 후원을 진행하고 있지만 실제 후원금액이 지원에 사용되는 형태를 보면 이전의 마을후원 모델과 같다. 특정 지역에서 그 지역의 아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동이 지원 지역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는 것이다.
1:1 결연의 경우 내가 후원하던(소식과 정보를 받아보던) 특정 아동이 사라지면, 더 이상 후원할 대상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첫 번째 A아동이 살았던 지역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지만 나는 그 지역에 대한 지원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인데 결연 후원 프로그램의 구조상 이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혹은 선택하지 않은 이탈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때 그 마을에 대한 후원을 더 해야한다고 느꼈다. 가족이 단체로 이주하는 사정이 아니라 아이가 조혼을 하거나 취업전선에 나서야 하는 등의 상황에서 아이는 직접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권리나 능력이 없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부모 또는 그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선택한 결과이다.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택을 지양하고 아이가 스스로를 돌볼 준비가 될 때까지 잘 자라도록 돌볼 의무가 있다. 이런 돌봄과 보호를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과 문화, 시스템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후원금을 모으고 지원을 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이 발생한 마을에 대해서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까지 교육과 지원을 더 확대해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개(!) 후원자 입장에서 후원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종료된 뒤에는 그 지역 아동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두 번째 A아동과의 결연이 종료되었다는 안내를 받았을 때 내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게 이 부분이었다: 내 후원이 종료된 그 지역은 앞으로 어떻게 지원받을 수 있는가. 이번에는 나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후원이 전체적으로 종료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더 확인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두 번째 A아동의 나이가 아직 어려 걱정이 많이 됐다. 담당 직원은 긴급구호 형태로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만 전했다. 학교 등은 모두 철수하고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나 기타 지원은 사실상 끝나는 것이다.
사실 내가 후원하던 아동은 산골마을에 살고 있어서 그간 뉴스에 등장하는 큰 소요나 저항이 있을 때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또 국내 뉴스에서는 이 국가에 대한 소식이 최근에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해외 뉴스를 검색해보니 사태는 아직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아동이 전해온 소식에서는 이미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에 모여서 수업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스님들이 동네에서 조그맣게 모여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이라고 하는 소식을 보면 국가 정치상황으로 인해 이 마을에까지 나쁜 일이 직접 닥쳤다기보다 세이브더칠드런 팀이 오가며 해당 지역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이 매우 커진 것이라고 본다. 다행인 면도 있지만 사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세이브더칠드런 팀이 빠졌어도 지역사회 내에서 교육이 지속되길 정말,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것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이 교육은 우리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를 읽고 수업을 들으며 배우는 지식의 습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맞고 틀림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교육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아이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교육은 필요가 아니라 필수다.
두 번째 A아동에게 가끔 편지를 썼다. 얼마나 이 내용이 전달될까, 라는 의문이 항상 있었지만 그래도 편지에 항상 신경을 많이 썼다. 개인적인 내용은 먼저 묻지 않으려고 했고 아동이 보낸 편지에 쓴 내용에 답하거나 칭찬해주는 말을 많이 썼다. 특히 공부를 다양하고 즐겁게 하도록 북돋워주려고 애썼다.
한 번은 아동이 꿈이 군인이 되는 것이라고 써서 좀 놀랐던 적이 있다. 편지에 뭐라고 써야 하나 고민하는 내게 오히려 교사생활을 오래 하셨던 부모님이 어릴 땐 꿈이 자주 바뀌고, 어떤 꿈을 가진대도 어른이 걱정하거나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해주셨다(실제로 이후에도 꿈이 자주 바뀌었다). 교육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더 다양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게 도와주는 것, 직접 경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더라고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깨닫게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러게 위해 먼저 아이의 시각을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해주는 것까지도 교육이다. 난 이게 절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어른의 몫이고, 직접 도움이 가 닿을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도 어떻게든 이뤄져야 할 무엇이라고 본다.
비록 "희망은 더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라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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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권리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게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항할 권리보다 글이 길고 좀 더 어려웠는데, 완전히 다 이해하진 못한 것 같지만 저항할 권리에서 논의된 것들이 좀 더 완성되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감벤이라는 철학자가 왜 이런 논의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팬데믹 초기에 이탈리아의 상황이 어땠는지도 같이 생각해보게 됐고 그때 한국의 상황과 한국에서 바라본 상황이 어땠는지도 떠올릭 됐다. 그가 비판받았던 이유가 된 글도 실려있는데 그 글을 읽어본 것도 좋았다. 아감벤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만 하지 않고 좀 더 다면적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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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무엇도 옳거나 그르지 않다. 다만 아감벤이 제시한 것 같은 시선과 논의가 전혀 없다는 걸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다는 게 좀 소름돋았다. 팬데믹 발생 후 나 역시 일방적으로 모두의 건강, 생명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압박했던 적이 많다. 모든 걸 과학과 의학의 목소리로 이해하고 과학이니까, 라며 토 달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현재 팬데믹라는 상황에서 세계가 정치가 인간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그 모습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얘기나눠본 적도 없었다.
아감벤의 주장과 사유는 옳은 점도 틀린 점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말 하나 하나에서 옳고 그른 점을 골라내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 역시 그런 것을 바라지도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 같다. 그는 이 팬데믹 상황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그 변화된 정치 사회적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바라보기를 원한다. 눈을 뜨고, 손을 잡아 접촉하고, 스스로를 감각하기를 원한다. 얼굴을 드러내고 표정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마음에 들었고 책장을 덮고도 기억났던 문장이다.
“비록 "희망은 더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라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 말처럼 더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희망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손을 잡고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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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연못에서 수선화 사진을 찍으시는 박사님과 그 너머로 보이는 연못에 빠져죽은 자전거.

16.2.22 12:31
+화일이가 빠져죽은ㅋㅋㅋㅋ 하고 댓글을 달아놨다. 쓰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난 이 사진과 설명이 정말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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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건 참 쉽다. 쓰는 건 어렵다. 그래서 잘 읽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듣는 것도 쉽다. 말하는 건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잘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잘 읽으려면 잘 쓸 줄 알아야 한다. 또, 잘 들으려면 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을 할 줄 알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상대방의 입에서 말을 꺼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새해에도 나는 여전히 잘 듣지 못하고 잘 읽지 못하고 있다.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있다. 🙁



16.1.8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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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은 '표지가 얼마나 예쁜가'이다.
또, 책의 속내용을 살피기 전에 겉표지와 뒷표지, 책 날개에 쓰인 잡다한 글귀들을 먼저 꼼꼼히 읽어보는 편이다.
마치 밥을 먹기 전에 물을 마시고, 음식과 식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밥상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것처럼 책도 속내용으로 허겁지겁 달려들기 전에 천천히 차림새를 살피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셈이다.
단편집을 읽을 때는 더한데, 수필집이라면 글을 읽는 것 자체로 저자에 대해 알게 되지만, 단편집의 경우 글을 읽는 것만으로 저자에 대해 직접 알아내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한 사람이 쓴 여러 편의 글을 모아 읽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글 속에서 그 사람의 특징적인 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을 한 층 더 깊이 느끼려면 저자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미리 알고 들어가면 더 좋다(나의 경우).
지금까지 이런 책 읽는 습관이 낭패를 불러온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을 때였는데, 책 앞에 역자의 해설이 너무 강하고 길게 쓰여있어서 읽는 내내 그 사람의 의견에 내가 너무 지배받고 있구나, 라고 느꼈던 적이다. 그래도 이 습관을 딱히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제오늘(부터 아마 약 일주일간), 태어나서 어쩌면 처음 하는,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됐다. 창비 #눈가리고책읽는당 2기에 운좋게도 신청이 되어서 책을 받았다. 하얗고, 제목도, 저자도 아무것도 없는 책이 왔다. 다만 단서:라며 세 단어가 달려있기만 하다.
단편집이라고 생각되어 더욱 기대된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는데, #광인수술보고서 가 문득 떠올랐다. 화자가 관찰대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화자가 관찰한 관찰대상이 사실 화자였던 것 같고 다시 화자의 눈은 관찰대상을 쫓아가고 있어 어지럽고 오묘하다.
다음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어쩌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오랜 내 책 읽는 습관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기대된다.
16.1.15 22:52
+댓글에 <지극히 내성적인> 이었다고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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