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런,온>에 나왔던 걸까, 띠지 이미지가 드라마 장면이다. 위로를 주는 에세이로 1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당신을 위로하겠는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는 제목이,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차를 펼치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된다. 글씨가 너무 작고 흐리다(이게 목차인 건가? 이걸 보라고 쓴 건가? 배경으로 넣은 것인가?). 타이포로 시작하고 대변되는 편집이 전체적으로 깔끔하지 못하다.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지만, 국내 자비출판 서적을 보는 것 같다. 뒷표지를 얼른 넘겨보니 발행인이 저자다. '아, 역시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뒤에 찾아보니 부크럼 출판은 생각보다 매우 많은 책을 벌써 펴냈다(자비출판은 아니라는 건데). 위아래의 여백도 달라지고, 문단 사이 간격도 갑자기 벌어지는 곳이 몇 번씩이나 보인다. 뒤로 갈수록 책장의 앞뒷면으로 다음 장의 줄이 어긋나 비춰보이는 것까지 거슬리게 된다. 편집이야 뭐, 내용만 좋으면 되지. 하고 넘어가보자-니 편집만이 문제는 아니다. 저자가 대표여서인 걸까, 문장구조와 맞춤법에 잘못된 부분은 왜이리 많이 보이는 것일지. 사실 첫장을 넘기면서 글의 "공감을 더욱 끌어내기 위해 화자와 문체가 내용에 따라 바뀐"다는 '안내 문구'를 봤을 때부터 내려놓고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분히 짧고 우울한 감상에 젖어있기만 한 어떤 책들과는 다르다. 단순히 '좋아보이는' 문구들을 늘어놓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이게 정말 저자의 경험이고 에세이일지는 잘 모르겠지만("화자와 문체가 내용에 따라 바뀌"고 있으므로) 가족의 얘기, 지나간 연인(모두 가명으로 보이는)과의 얘기를 하면서 자신과 그 상황 속 상대방에 대해 담담하게 위로를 건넨다. 정말로 위로가 되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감정만 쏟아내거나 화자 자신을 위로하기에 바쁜 글이 아니라 정말로 화자(또는 저자)가 대화하는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이고 글이었다. 무엇보다 한 편의 글 안에 완결된 위로가 담겨있는 느낌이 들었다. 위로를 하려고 시작한 건 맞는데 얼버무리듯 끝나거나 자기 얘기를 하며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정말 끝까지 상대를 위로한다(아무리 맞춤법이 틀려도 진심으로 나-독자에게 눈을 맞추고 끝까지 위로를 마무리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덜어내야 한다고 배웠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덜어내고 지워야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것에 반대되어 내 취향엔 거슬렸던 것 같다. 정말 위로는 되었지만, 친구가 어떻게든 모든 걸 끌어모아 나를 위로해주려고 이 말 저 말을 다 끌어대며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형용사와 부사를 여러 개 끌어쓰고, 여러 개의 반점을 찍고(위치라도 잘 잡아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과거와 현재, 미래 시제를 한 번에 다 말한다. 뭐가 그리 정하기 힘들었을까? 하지만,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 분명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 이 말 저 말 다 끌어내어 위로해주는 친구의 말이 어찌 마음에 와닿지 않을까. 아무리 그게 횡설수설이고 그날 자기 전에 생각해봐도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도, 그런 친구의 말을 듣고 나면 내 마음은 이미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내가 구입하거나 직접 빌린 것이 아니라 엄마가 나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고 선물로 주셨다. 정말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위로를 전해주고 싶을 때,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을 떄, 정말 '다 괜찮다, 애썼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을 때 건네기에 너무나도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선물할 책은 사실 소장용으로 완벽한 가치를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면(정말 다 소장하고 꼼꼼히 읽으려고 한 것이라면) 이 책을 구매한 10만 명 넘는 독자군-구체적으로 말하진 않겠다만,은 맞춤법이나 문장, 구성이나 편집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대학원 때 일종의 독서모임을 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 글을 서로 같이 읽고 얘기하는 경험을 했다. 어릴 때부터 책은 꽤 많이 읽었던 편이고, 독후감도 종종이지만 써왔는데, 내가 좋은 책을 잘 읽고 있는 건지, 또 독후감을 잘 쓰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독후감 쓰는 것이 일기와 함께 주요한 과제였는데, 1학년 때 우리 반에 '정미'라는 이름의 친구가 독후감을 너무 잘 써서 선생님이 항상 칭찬해주셨던 게 기억난다. 그 친구처럼 독후감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쓴 독후감은 대체로 글의 줄거리를 요약한 거였다. 하지만 정미의 글은 그의 감상, 느낌, 책을 읽고 떠올린 자신의 경험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내용만으로 독후감 노트 한 바닥이 가득찼다(게다가 그는 글씨체까지 크고 보기 좋았다). 나도 그같은 독후감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열망에 가까웠지만, 정작 나는 그런 독후감을 거의 쓰지 못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 많이는 읽었지만, 좋은 책이 어떤 책인지는 알지 못했고 읽고 난 책에 대해서도 왜 그 책이 좋았는지(혹은 싫었는지)를 생각해본 적도 별로 없다. 책을 읽고 난 뒤에 깊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걸 글로 쓰는 걸 처음 한 게 그 모임에서였다. 모임을 이끌었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독후감과 서평은 다른 것이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 말이 나는 조금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쓴 글이 '독후감'으로 분류되는 일은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한 일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좋은 점이나 나의 단순한 감상을 말하기보다 고쳐야 할 점을 찾아 지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평이란 글을 읽고 난 뒤 내 감상을 단순히 글로 정리해서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어떻게 쓰였는지, 구조와 문장, 단어같은 것들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잘 쓴 글이 무엇인지, 글과 문장의 구조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서평'은 내가 쓸 수 없는 무엇일 뿐이었다.
책을 읽을 때 날개와 표지에 있는 글까지 샅샅이 읽는 편이다. 서문이나 평론, 옮긴이의 말 같은 것이 많은 책에 붙어있는데, 말 그대로 그 책에 실린 글에 대한 평가다.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글은 정말 어렵고 재미도 없다. 난 아무래도 그런 글은 쓸 수 없을 거라고 매번 생각한다(쓰고 싶지도 않다). 서평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 책 <서평의 언어>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리케이 윌머스의 글은 내가 이전에 생각해오던 '서평'이 아니었다. 메리케이 윌머스는 어떤 책이나 글 하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글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상,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섞어서 하나의 글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자기 생각만을 쓴 건 아니다. 특징적인 것은 서평의 대상이 된 글을 직접 인용하면서 자신의 글을 채워나간다는 점인데 그게 매우 자연스럽다(아, 이게 바로 서평-Book Review이라는 거구나!). 항상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생각하는 것인데, 배경지식에 따라 글을 쓸 때도, 읽고 이해할 때도 차이가 엄청 커진다. 글을 쓸 때는 아는 게 많아야 표현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드는데 반대로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쓴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의 주장과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구나~ 하지 않기 위해서도 경험이 다양해야 한다. 메리케이 윌머스의 글은 단순히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저자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풍부하게 읽히지 않아 좀 아쉽고 힘들었다. 예를 들어, 조앤 디디온의 <마술적 사유의 한 해>와 <푸른 밤>에 대한 서평을 보면서는, 지난 해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 떠올라서 풍부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진 리스에 대한 글에서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해서 그만큼 풍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 리스와 그녀의 작품이 엄청 궁금해지긴 했지만(아는 바가 없어도 글이 정말 재밌게 읽히긴 했다는 뜻이다), 이 리뷰를 읽기 전에 이미 내가 아는 바가 있었다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메리케이 윌머스가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재치있어 꼭 만나 대화하고 싶지만, 막상 현실이 된다면 내 무지와 부족한 경험 때문에 그가 나와 대화하기를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그러진 않겠지......). 경험과 아는 바가 풍부하다는 점도 멋지지만, 메리케이 윌머스의 말투도 멋지다. 솔직하고, 거침없다. 함부로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웃지 않지만, 할 말은 다 한다. 에둘러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샌드위치 방식으로 내 이미지를 신경쓰지도 않는다. 이런 게 바로 잘 쓴 글이겠지, 생각하며 읽었다배웠다. 시간순으로 글이 담겨있는 것 같은데, 80년대에 쓰인 글보다 2010년대에 쓰인 글이 왠지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글도 다 좋았지만, 피터 캠벨에 대한 글은 특히 굉장히 좋았다.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는 느낌이 있었고, 피터 캠벨이라는 사람도 메리케이 윌머스만큼이나 멋진 사람 같았다(여기서도 '멋진애 옆에 멋진애'). 이 책에 담긴 윌머스의 글, 그리고 피터 캠벨의 그림은 한 번도 보진 못했지만, 윌머스의 글에서 묘사된 그의 그림과 그의 모습을 읽고 이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좋은 글/그림은 많은 내용을 담았느냐보다 그것을 쓴/그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담겨있느냐가 아닐까.
메리앤에 대한 글인데, 너무 멋있다. 이런 메리앤의 모습이 곧 윌머스의 모습이고 피터 캠벨의 모습일 것 같다.
회사에서 그래도 배려를 해줘서 내내 재택근무로 지낼 수 있었다. 병가를 쓰는 것도 단순히 '규정에 있고, 쓸 수 있는 거니까 내 권리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아리나 친목집단이 아니므로 무조건 내 편의대로 움직이는 게 맞다는 생각에 젖어들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매번 알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받아들이거나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에 있으니까 대화할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데, 엄마한테 미주알고주알 쏟아내기까지 했으니 내 시야는 얼마나 좁았던 걸까.
정말 웃겼던 건 아빠가 저녁때 집에 오면, 오자마자부터 엄마한테 사람들 험담을 엄청 하는데, 평소에 TV보면서 욕하거나 하는 것과 달리 이 장면은 내 눈에 안경이 씌어있었다는 걸 깨닫게 했다. 내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엄청 들어서 올해 나를 깨어나게 한 순간 TOP1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불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완전히 사라지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애쓰려고 한다. 손흥민의 사진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으려고 애쓴다. 입꼬리를 올리는 연습을 정말 생각 날때마다 하고 있다. 그리고 웬만하면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라고 대답하려고 한다. +월요일(1/2)에 미팅할 때 "네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스스로 기분이 좋았다.
그냥, 내가 별로 바라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사실 스스로도 잘 하지 못하면서 성에 차지 않는 것들에만 먼저 눈을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직접 말하기도 굉장히 중요하다. 2017년-정말 옛날이 되어버린 땐데, 닷페이스에서 서로 피드백 주는 시간을 꼭 가진다고 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얼마나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중앙일보의 편집장님은 팀의 기자님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쌓는 게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한 잔 하거나 하며 '개인적인'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이런 피드백 시간이나 개인적인 대화 시간은 모두 직접 말하기의 시간이다. 직접 전달할 계획(과 노력)이 없다면, 그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사치레하는 것도 머쓱하기도 하고(뜬금없이 말 던지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낀다) 싫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행에 옮겨야 한다. 꼭 진심을 담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어떨 때 어떤 말을 어떻게 건네는 것이(그리고 누구에게, 까지도?) 필요한 인사치레인지를 사실 잘 모르겠다.
예전에-2019년에 주말에 출근했다가 실험실을 갔다 자리에 와보니 빽다방 음료가 놓여있었다. 주위를 보니 당시 주말에 거의 항상 출근을 하던 사수와 동급의 다른 시니어 분들도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 책상에 놓인 건 유일하게 버블밀크티였다(!). 그룹장님이 출근하며 사오신 건데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음료를 집어들고 그대로 퇴근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며칠 뒤-그날이 토요일이었으니까 아마 다음 주 화요일즈음?에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나 그룹장님이랑 둘이 걸어가게 되었는데, 커피 잘 마셨어? 라고 물어보셔서 네 잘 마셨습니다. 했더니 엎드려 절받네 라고 허허 웃으며 지나가듯 얘기하셨다. 나는 좀 그런, 애였다.그런 애다. 단톡방에서 하는 인사는 의미없다고 생각해서 참여하기가 싫은. 개인적인 인사도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지 의무적으로 하거나 다들 하니까 마지못해 또는 해야되나, 싶어서 하는 건 정말 싫은. 이게 예의없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예의없음이라기보다 무심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소의 예의바름, 경우있음 같은 것과는 전혀 연결지어지지 않는 이런 인사치레, 예의는 조금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다. 아직은 어렵다.
업무에서 전문성을 더해가는 것, 커리어를 쌓는 것은 사실 마음을 많이 놓았다. 내가 애쓴다고 달리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게 사실인데 이번에 깨달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회사나 조직을 평가할 이유나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저 내가 항상 잘 배우고,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집중하고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올해 정말 많이 게을러졌으니까-물론 몸이 안 움직여서 어쩔 수 없고 자연스러운 변화였지만).
#이웃
우연히 본 <3%>가 촉발제였다(확실히 많은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비마이너에 후원을 추가했다. 달랑 만원이었는데, 두세달 정도 하고 바로 취소를 했다. 올해 스스로에게 가장 실망하고 부끄러웠던 것이 바로 이거다. 세이브더칠드런에 십년 넘게 하고 있는 후원은 월 삼만원이다. 이것도 사실 쥐꼬리만한 돈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꾸준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한다. 그런데 두 번째로 갑작스럽게 결연도 종료되었다. 좀 안타까웠다. 마침 하반기에 만약에 지금 후원하고 있는 아동과의 결연이 종료되면 국내아동 지원사업으로 후원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나서 정말로 결연이 종료됐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없을수록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내 안에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게 좀 무너지고 흔들렸다. 네평 남짓한 방 안에 누워있으면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도 많이 좁아졌지만 가장 많이 좁아진 건 마음과 생각의 평수였다. 작은 일에 무지하게 흔들리고 쉽게 무너지는 헐렁한 벽을 자꾸 지어 올렸다. 불안감이 일상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음을 컨트롤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명상 영상도 많이 찾아보고 시도해봤고, 연초에 읽었던 얇은 위빳사나 책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반복적으로 되뇌기도 했는데, 그래도 많이 힘들었다. 정말 난생 처음으로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전에도 이런 생각과 감정을 가졌던 적이 사실 한 번 있다. 2016년 여름부터 초겨울께까지였는데, 그때는 진짜 맛보기 수준이었다.
해결할 수 없는 벽이었는데 계속 거기 부딪히면서 부서지고 또 부수다가 2023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생각했다. 흘려보내. 무반응. 어려운 시간이 될 거다(사실 벌써 1월 3일, 어제 한 번의 사이렌이 울렸는데, 그래도 잘 지나고 있다; 지금은 1월 4일 11:47). 사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척 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상상하고 예지하는 일을 그만둬야지. 돌이켜보면 어릴때부터 예지하고 추측하는 상상을 엄청 많이 해왔던 것 같다. 왜 이걸 인지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만큼 내가 이런 상상에 강렬하고 쉽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냥 나의 특성이겠지, 한다.
아무튼,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게 내가 기준을 흔들리지 않게 잘 붙잡고 있는 데 유일하게이면서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래서 후원을 또 다시 시작해야한다, 이런 것은 의미없는 강박과 의무감인 것 같다. 그보다 주위에 시선을 좀 더 두려고 애쓰고, 그 누구의 삶도 노력도 쉽거나 작지 않다는 걸 항상 생각하려고 한다. "존중"과 "존경". 어떻게 보면 "다정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그것을 잘 지켜나가고 또 키워나가려고 한다.
#2023
많이 배우고, 많이 성장하고 싶다. 특히 내적으로.
그저 엄마가 던진 말에 단순하고 간단하게 대답한 것 뿐이었는데, 진짜 이게 중요한 목표이자 행동지침이 되었다-달력의 해가 바뀐지 이틀만에.
마음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할 거고, 그 외에는 아무것에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거다.
새해는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하루하루를 내 마음에 드는 날, 좋은 날로 채워나가자.
엄마와 떡국 끓일 재료도 살 겸 산책을 나갔다. 스타벅스에 앉아서 돌체라떼를 시키고, 떡집에서 사온 찹쌀모찌를 나눠먹었다. 엄마는 내게 새해가 좋은 해가 되길 여느때보다 더, 아주 많이 기원하고 계셨다. 내게 2022년은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한 해였다. 물론, 그걸 바로 옆에서 한 시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 엄마에게도. 엄마는 내게 2022년을 다 잊으라고도 2023년을 잘 만들라고 당부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새로운 해는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매일을 내 맘에 드는 날로 만들자고 하셨다. 2023년이 오기를 그리 기다린 것 같지는 않지만, 2022년이 끝나기는 은근히 기다렸던 것 같다. 그 어려움이 기한을 두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이 해가 끝나면 힘듦도 아픔도 끝나고 모든 게 새로 시작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2022년을 닫는 말
지난 해를 돌아보면 정말 지루하기 그지없다. 매일이 똑같고, 즐거운 일이나 기억나는 일이 딱히 없다. 그러면서도 하루, 한 달, 한 계절이 어떻게 지나는지 알 수 없게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정말 어느 새 봄, 어느 새 여름 끝, 어느 새 겨울이었다. 이렇게 한 해를보낸 적은 정말 처음이다. 감정의 변화도 적었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해서 관계에서 되새길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회사와 관련해서도 사건이 없었고, 회사 외적으로도 한 일이 없다. 이렇게 지루하고 매일 똑같았던, 정말 평행선같은 날들을 보냈는데 시간은 왜이리 빨리 갔나 모르겠다. 정말 어느 해보다도 빨리 지나간 해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31살에서 33살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정말로 지난 한 해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지루함
1월 8일 토요일. 내 생에 너무 늦은, 그리고 어쩌면 인생 최고의 일탈을 벌였다. 어릴 때 못 놀아 본 티가 난다, 고 스스로 많이 생각했다.위험한 상황이 되지 않고 단순한 사건이자 일탈로 끝나고 만 것은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았던 내 복이고 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도 이날 이후로 사람의 인생에서는 다 어느 때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어떤 상황도 행동도 다 '나에겐 왜 이런 일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게 적절한 때에 벌어진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데 턱이 높아지냐 낮아지냐는 다른 것 같다. 올해(2022년)가 이렇게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던 것,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이 정도 사회생활을 하던 중에) 부모님 집에서 1년간 24시간을 부대끼고 보내게 된 것에 대해서도 다 나에겐 올 해가 이런 때다,라고만 생각했다. 친한 친구 중 하나는 일에 너무 치여서 바쁘게 한 해를 보냈는데(내년은 더 바쁘고 힘들 것 같아보이지만), 그는 종종 자신의 바쁨을 미안해했다. 하지만 난 그의 바쁨과 거기서 비롯된 어려움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친구에게 올해(2022년)가 그런 바쁜 때인 것뿐인 거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에게 이 말을 정말 많이했다). 무엇보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은 그 '때'에 대한 이유도 있다, 완성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생을 살면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게 아닐까. 이게 올해(2022년)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1월 8일 #때 #턱
가을쯤이었나 인터넷에서 이런 글귀를 봤다. "당신이 가장 많이 교류하는 5명의 평균이 지금 당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5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내 표정은 심각해지고 말았는데, 내가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상이었기 때문이었고, 삼십여년을 쌓아온 '나'라는 인간상에 내가 싫어하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는 걸 계속해서 깨닫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 해가 다 지나갈때 쯤에야 올해는 내게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 환경에 이정도 시간과 강도로 노출되지 않고서는 난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쯤 되었을 때 난 내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너무나도 가득차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소재로 어떤 글을 써도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이 묻어났다. 글자들이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그 감정을 떨쳐내기 전에는 문장 하나도 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해도 털어지지가 않았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 난 그 감정을 털어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난 그것들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털어내고자 했는데, 내가 가진 환경과 조건에서 이렇게 털어내는 방식은 작동하지 않았고 난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난 내가 좋은 부모나 좋은 선생이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보다 스스로에게 영향을 주는 데에 더 관심이 많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올해(2022년)를 지나면서-라기보다 사실 12월이 지나서지만, 적어도 난 내가 싫어하는 말투, 태도, 행동 등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는 데 80%정도 성공했다. 이전에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이제 그걸 알았으니 내 모습을 고치고 고정시켜나가는 데 얼마나 성공하는지가 중요해졌다. #인간상
작년(2021년)과 비교해서 2022년의 내 생활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네 평 남짓한 방 안에서 가만히 누워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가만히 누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고 5.4인치의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영상을 보며 보냈다. 리더스(RDRS) 앱을 이용해서 읽은 책을 기록했고, 독후감은 정말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해서 받아 읽은 책도 몇 권 있는데, 그 리뷰도 간단하게 인스타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저항할 권리> 한 권만 조금 생각을 정리해서 쓰고 싶어서 블로그에 남겼다. 초여름쯤에 페이스북의 기록을 다 없애고 싶어서 블로그에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학교에 다닐 때 페이스북에 독후감을 많이 남겼는데, 그때 남긴 글이 재밌는 게 많았다. 한참 옮기다가 멈췄는데, 이것 때문에 블로그 '책' 카테고리에 올해 올린 글 수는 좀 있다. 독후감을 안 남긴 것은 오랫동안 앉아 글을 쓰기가 힘들다는 핑계를 대기 싫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어쨌거나 읽은 책은 총 61권이다. 2-3월에는 집에 있던 책들을 다 읽었고, 4월에 조금 걷기를 시작하면서 방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며 책도 적게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동네 도서관 이용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책은 꾸준히 읽었다. 그러다가 6월에 다시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누워서 책만 왕창 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컨디션이 정말 안좋아지면서 6월 말부터는 책보기를 멈추고 핸드폰만 주구장창 들여다봤다. 직접 도서관에 갈 수도 없고, 누가 책을 대신 빌려다주지도(반납해주지도 ㅠㅠ)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집에 있던 두꺼운 책을 집어들어서 세 권을 꾸역꾸역 읽었다. 8월에는 이러한 상태가 좀 더 심화되었는데, 10월 초까지 <플라톤의 국가론>을 붙들고 꾸역꾸역 읽는둥 마는둥 했다. 이때는 정말 넷플릭스만 봤던 것 같다. 4월 중순부터 재택근무로 회사에 복귀했는데, 7-8월에 컨디션도 나빠졌지만 업무-특히 회의가 많아져서 낮시간에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저녁이후에는 날도 덥고, 에어컨 때문에 배탈도 자주 나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끙끙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고. 3월까지는 밤에 잠이 잘 안 오면 새벽까지 넷플릭스를 본 적도 꽤 있었던 것에 비해 정말 상태가 안 좋았다. 시간을 '보낸다'기보다 시간이 흘러가는데 내 몸이 거기 어딘가에 껴서 둥둥 떠내려갔다. 9월부터는 진료과를 바꾸고 마음도 좀 추스르고 컨디션을 끌어올리려고 스스로 좀 애썼던 것 같다. 내가 뭔가 노력하기보다 몸도 마음도 스스로 나아지려고 다잡았다는 느낌이 있다. 10월에는 <플라톤>을 드디어 끝을 내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기 시작했다. 또, 이때 읽은 책을 보면 출판사 인스타그램 이벤트로 받아 읽은 게 다섯 권(한 권은 11월에 마무리)이나 된다. 하지만 11월에는 다시 책읽기가 조금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조금 큰 책을 두 권(곰브리치 세계사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이 책들은 각각 이렇게 무거울 줄!! 그리고 이렇게 두꺼울 줄!! 모르고 빌렸다!) 읽었지만, 전체적으로 독서 시간이 줄어들긴 했다. 회사는 10월에 잠깐 남은 병가를 소진하고 복귀했지만, 업무량은 연말도 되고 해서 많이 줄어있었고, 마음가짐 자체가 많이 달라져서 업무에 매이느라 다른 시간이 없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넷플릭스에도 사실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는 정말 아무거나 대충 봤던 것 같다. 그리고 팟캐스트도 별로 듣지 않고, 산책 시간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 서핑을 괜시리 많이 했던 것 같다. 11월 마지막주에 월드컵 경기가 시작됐고, 네이버 스포츠에서 월드컵 영상을 다시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사이에 인스타에도 축구선수 관련 포스팅이 엄청 많이 보였고, 결국에는 유튜브의 맛을 알아버렸다...... 영상 들여다보는 걸 정말 이해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유럽 리그를 생중계하는 채널은 전부 유료라는 것을 깨닫고(990번대인 마지막 채널까지 부모님이 외출하셨을 때 TV를 돌려봤다ㅡ세상에) 유튜브에서 관심 리그와 구단을 구독했다. 그런데 경기가 매일 있는 게 아니라서...... 이것저것 짧은 영상들을 보게 됐다. 일단 손세이셔널 정주행. 그리고 마리텔 영상은 몇 개 보다가 질려버렸고... 거실에 나가 TV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유퀴즈도 유튜브로 짤막하게 보고, 주로 보는 것은 <아빠 어디가 시즌2>. 아마 안정환때문에 내 피드에 나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엄청나게 보고 있다. 그리고 리그 재개된 뒤에 하이라이트들을 보고. 90min에서 평점은 직접 보면서 유튜브 시청 시간은 조금씩 줄이고 있다. 다만 너무 핸드폰에 익숙해지다보니 12월에는 책이 손에 잘 안 잡히고 잡아도 집중해서 읽히지가 않게 되었다(이렇게나 빠르게??). 돌아보면 상반기에만 넷플릭스를 냅다 봤던 것 같은데, 영화는 총 160편, 예전에 봤던 걸 다시 본 게 2편(이터널 선샤인, 노팅힐), TV프로그램으로 분류되는 것은 39편 리뷰를 남겼더라(왓챠피디아). 역시 감상은 하나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올 한 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건 <동쪽 빙하의 부엉이>. 너무 좋았다(주제가 비슷한 <두더지 잡기>는 그냥 그랬다). 그림책인 <오늘의 개, 새>와 이 책을 출판한 사계절출판사는 언제나 사랑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래프를 보니 <H마트에서 울다>도 추천하고 싶다. 정말 좋은 책이었다. 자꾸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데 <위빳사나 명상>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몇 번 더 다시 읽고 위빳사나를 연습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 역사에 정말 무지한 나에게 <곰브리치 세계사>는 진짜 좋은 역사책이었다. 어릴때부터 위인전을 정말 싫어했고, 역사는 알아야 한다고 의무적으로만 생각했을 뿐 어찌 읽어야할지 알지 못했는데, 정말로 좋은 역사책이었다. 올해 내가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 저자는 압둘라자크 구르나. 디아스포라 문학의 거장이라고 하지만, 난 그의 글이 단순히 '디아스포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줬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내 정신을 완전히 바꿔버린 작가다. 도서관에 세 권의 책이 있었는데 두 권을 봤고, 다른 하나는 그사이 누군가 빌려갔더라. 우리 동네가, 지나면 지날수록 도서관이 잘 되어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구민들이 책을 정말 많이 보는 것 같다. 아 읽어야 하는데 누가 빌려갔어! 가 아니라, 너무 좋은 작가, 또 다른 사람이 읽는구나, 너무 행복하고 좋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화나 TV프로그램은 정말 의미없이 생각없이 본 게 많은 것 같아서 기억에 크게 남는 건 없다. 평도 워낙 많이 나와있는 것이 많고, 나도 대부분 그러한 평을 보고 좋다고 하니까 보게 되는 게 많으며 이 말은 선입견을 이미 갖고 시청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년 내내 너무나 호평 일색이었던 <헤어질 결심>은 오빠부부의 티빙 아이디를 빌려서까지 보았는데(청룡영화제 직전에 보았다), 마지막 장면이 너무 영상미가 뛰어났지만 대체로 나는 감동을 크게 받지 않았다. 왓챠피디아에 본 날을 기록해야하는데, 그게 자동으로 안 되고 예전에 평점 줬던 작품을 다시 확인해보다가 별점을 고친 경우가 몇 번 있어서 담은 날짜가 2022년으로 바뀐 게 몇 편 있다: 캡션 확인
홀리모터스 제외
역시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정말 좋았고, <아무르>는 충격적일 정도로 좋은 영화였다.
보헤미안 랩소디 제외
<20세기 소녀>도 굉장히 좋았다. 이런 느낌의 영화 정말 좋아하는데 요즘은 정말 잘 안 나오고, 진짜 좋았다. <굿타임>도 꽤 좋았다. 로버트 패틴슨 연기 정말 잘 하고 영화들도 좋다.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함께, 해리포터 영화 시대에는 내 맘에 별로 들지 않았던 배우인데 성인 연기에서 최애 배우로 바뀌었다.
한국 영화였던 <습도 다소 높음>이 꽤 마음에 들었다. 웬일로! 그리고 이때 은근 크리스틴 스튜어트 영화를 봤는데, 정말 나랑은 잘 안 맞는 듯한... 하지만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영상 연출이 진짜 너무 좋다. <엄마라는 집>은 구성이, <걸후드>는 소재와 그것을 표현한 방식이 정말 별로였다... <큐티스>가 살짝 생각나서 더욱 별로였지만 의외로 세간의 평은 좋았던 영화였다. <완탕 가게 수호신>은 매체 평이 별로였는데 난 굉장히 좋았다. 작년에 본 <듄>이 난 너무 좋았고 마침 내년 하반기에야 후속편이 나온다고 해서 그걸 영화관에 앉아 보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그야말로 웃음이 빵 터졌다. 드니빌뇌브 감독은 정말 능력은 뛰어나지만 상상력에 한계가 명확한 사람인가 싶었서.
<홀로그램 포더 킹>을 보면서 정말 나는 톰행크스 영화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고(하하핫). 너무 웅장하고 음악과 영상이 클래식하게 멋지지만 브래드 피트의 영화는 일부러 그만 봐야겠다고도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캐리 멀리건은 정말 언제나 좋다.
이터널 선샤인은 다시 한 번 더 본 영화.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놓쳤던 <한나>를 드디어 봤다. 프레디 하이모어는 너무 역변한 것 같아 슬펐고. <슬램>과 <우리, 운명일까?>가 정말 좋았다. <더 킹 오브 스테이튼 아일랜드>도 좋았고. <이터널 선샤인>와 <노팅힐>을 다시 봤는데, 다시 보니 더 좋았다.
셔커스, 폭풍의 언덕 제외
<보이지 않는 끈>도 좋았고, <남색대문>도 좋았다! 홍콩/대만 영화를 내가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엄마라는 집>같은 것도 있어서 정말 좋거나 최악이거나 너무 모아니면 도인듯하다.
본 날짜 또는 추가한 날짜가 기록되지 않아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호우시절부터는 2021년 12월에 본 영화 같다.
<허니와 클로버>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보고 나니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지금 보니 작년 말에 본 영화들이 좋은 게 정말 많네...... <헬로 케이티>도 올리비아 쿡을 발견하게 해준, 좋은 영화였고.
재미로 확인해본 별점 분포.
하반기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일부러 좀 봤고, 옛날 영화와 다큐를 많이 봤다. <미국 소녀>, <h다이어리>, <우리의 4일> 같은 영화도 포함해서.
여기서도 크리스마스에 집에가려면 시즌1, 쾌걸춘향, 하트시그널 시즌1, 스타트업, 구르미 그린 달빛, 데프유, F1 시즌 1과 2, 파리에선 사랑을 이하는 예전에(2021년!) 본 것들이다.
한국: 1월에 파견을 가서 <그 해 우리는>을 진짜 열심히 봤다. 김다미 배우, 최우식 배우의 연기도 좋아하고 영상과 음악도 겨울에 어울리고 좋아서 정말 빠져있었다. 한 친구가 이 드라마가 왠지 모르게 '현타오게 하는 느낌'이 있다고 언젠가 말했는데 이 말에 정말 공감한다. 뭐라고 설명을 더 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변혁의 사랑>이라는 한국 드라마...를 은근 귀엽다고 생각하며 봤고, 2018년 여름에 TV를 돌리다 우연히 <청춘시대 2>를 몇 편 봤었고, 그때 기억이 굉장히 좋았는데, 곧 넷플릭스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시즌 1, 2를 정주행하고 나니 너무 별로였다. 실망을 왕창 했다. <호텔 델루나>도 정말 좋았다. 대사나 소재를 다루는 방식들이 정말 너무 마음에 들었다. <서른, 아홉>은 재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때우려고 시작했다가 의외로 꽤 좋아서 뒤로 갈수록 재미있게 봤다. 유럽: <인터넷으로 마약을 파는 법(빠르게)>도 좋았고, <삶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도 정말 좋았다. 제발 시즌 2나왔으면 할 정도였다. <더 크라운>을 정주행했다. <F1>은 언제나처럼 좋았고 올해 나올 시즌 4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려면>은 시즌2로 더 완성도가 높아지고 따스해졌다. <클라르크>도 빠른 전개와 영상 구성이 개성있고 좋았는데,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뒤로 갈수록 질려버렸다(사실 마지막 에피소드 두 개는 안 봤다). 미국/남미: <스위트 투스>도 굉장히 좋았다. 시즌2 나온다고 하는데 대체 언제...? <3%>는 진짜 우연히 눌러서 봤는데 너무 좋아서 새벽까지 보고 또 올 해 단 한 개 썼던 원고(자음과모음 여름호)에도 언급할 정도였다. 최고의 드라마: 부요왕후!!! 올해 여름쯤부터 다시 듀오링고를 시작했는데, 중국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시작했으나 중국어에만 집중하고 있다. 링고는 중간에 좀 시들해져도 그럴 땐 조금만 해도 되어서 부담이 없다. 중국어가 좀 들리나 궁금하기도 했고, 호기심이 생겨서 갑자기 중드를 하나 골라서 봤는데, 하필 그것이 부요왕후였고, 너무 최고였다. 정말 빠져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봤다. 다 본 뒤에도 한 1-2주는 여운에 허우적거리면서 다른 무엇도 보거나 읽지 못할 정도였다. 중국어 단어는 몇 개 정도씩 들리기도 했다(하하핳). 두 번째로 좋았던 드라마는 <퍼스트러브 하츠코이>인데, 내가 넷플릭스로 뭘 보다 운 건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일본 특유의 우리는 동양의 유럽인 정신이 나와서 또 '굳이..?' 하는 스토리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유는... <그 해 우리는>처럼 별로인 구간도 많았지만 이유를 모르겠는 좋음이었다. 많이 읽고 많이 봤고, (팟캐스트!)많이 들었지만, 쓰는 건 정말 0에 가까웠다. 조금 쓰려고 했던 글들도 다 별로였고, 재미가 없고, 그 원인은 내 안에 가득한 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감정을 걷어내거나 넘어서서 재치있게 바꿀 수 있을 여유나 기분을 도무지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아. 라고 생각했고, 생각한다. #기록
↑읽고 본 기록에 대한 부분이 너무 기네.
올해는 '소유'에 대해서 회의를 많이 느꼈다. 몸이 좀 나아지고 나서는 정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니 사실은 몸이 많이 아팠을 때도 이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상태가 안 좋을 때는 회사를 그만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고 생각하며 조기 은퇴와 작은 가게(책방)를 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으로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상태가 좋아지고 나서는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엄청 많이 하게 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데 올 해를 지나면서 정말 결혼따위 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결혼은 필요하지 않다고 정말 간절하게 속으로 목놓아서 많이 외쳤다. 물질적인 것도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많이 느꼈다. 특히 집. 다만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 돈은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수단이 굳이 부동산일 필요는 없고, 또 부동산이면 오히려 매여있어야 하므로 안 좋다고 생각은 많이 했다. 혼자이기를 더 선호하고 조금은 원하게 된 것은 정말 내가 '아파서'였다. 첫 번째로, 나는 내가 아픈 것에 대해서 주위의 반응이 심해지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주위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중 최악의 것은 누군가가 내가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아픈데 타인이 화가 난다는 건 사실 이해하기 좀 어렵다(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해가 될 리는 없을 것이긴 하다). 내가 좌우명이 '이아환아 이안환안'이고, 사회생활의 기조가 '강강약약'이라고 자주 말하고 다니는데, 여기에 너무 상충되는 상황에 처하면 나에겐 최고로 괴로운 순간이다. 내가 한 행동과 상대방이 하는 행동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정말 괴로워진다. 대부분 해결하거나 피하기 어려운 상대일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나는 스스로도 그리고 주위에서도 누군가 아팠던 경험이 많아서 내가 원하는 반응이랄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받기가..... 쉽지가 않다. 잠깐 아프고 지나가면 괜찮은데, 스스로 아파서 나에게 오는 자극들(주위의 반응 등)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원치 않는 자극들, 반응에 노출되자 심리적으로 점점 악화되었고, 여기는 한 번 가속도가 붙자 겉잡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친구들의 도움이 엄청 컸다. 아픈 걸 웬만하면 많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거나 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만났다. 그럴 때 사람들마다 반응이 정말 많이 달랐고, 친구들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굳이 얼굴을 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와써 잠깐만이라도 보고 가주는 친구도 많았고, 진짜 많은 힘을 주고 갔다. 전화나 메시지로도 응원해주는 친구도 많았다. 단순히 말로만 응원을 전달했다는 느낌을 주는 때도 당연히 많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응원이 되고 또 내가 상황을 다 말 하지 않아도 모든 감정을 다 녹여버리는, 표현이 멋져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전해져서 모든 걸 다 상쇄시켜버리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정말 말로 할 수 없게 고마운 친구였다. 무엇보다 '만나자'고 약속을 했거나 심지어 메시지를 조금 하다가도 내가 컨디션이 나빠져서 갑자기 조용해지거나 약속을 급히 취소해야 할 때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기도 전에 먼저 나를 배려해주는 친구의 모습에 마음 속 가득히 고마움과 사랑을 느꼈다. 아프면서 대화를 할 때 조금 더 천천히해도 좋고, 조금 더 가라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어쩌면 삶에서 처음으로 했다. 아직 좀 어렵고 시간이 지난 후에 떠오르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생각이 자주 난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더 자주 하고 행동으로도 옮겨서 나중엔 '이래야지'가 아니라 그냥 내 모습이 되길 바란다. 아무튼, 5월에 있었던 오빠 결혼식에 두 명의 친구가 찾아와줬고, 내가 집앞에도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10월부터 집앞으로 친구들이 찾아와줬다. 자신도 많이 바쁜데 와서 볼 수 있는 시간(내가 버틸 수있는 시간)도 매우 짧고, 우리 집이 매우 먼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와주고, 와서 보고싶다며 마음을 전해준(난 이게 사랑이라고 본다) 친구들에게 힘을 정말 많이 얻었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한 친구들. #바라는 것들
회고라고 깔끔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라고 적어본다. 좀 이말 저말 적었고 깔끔하게 적지도 못한데다 읽고 본 것들에 대한 내용만 엄청나게 긴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다 적은 것 같(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아깝고, 의미없다(!). 올해(2023년)도 생각 없이 의미 없이, 잘 살아야지. 소중한 사람에게 더 소중하게 대해주면서.
가나전이었다. 주장인 손흥민 선수의 팔에 찬 완장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녹색 바탕에 “save the planet”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카타르 월드컵이 (말로는)친환경, 탄소중립 행사라고 해서 저런 완장을 만들었나보다 했다. 월드컵같이 큰 행사에서 좋은 문구를 심어 좋다고 생각하고, 잊었다. 그리고 브라질전이었다. 손흥민 선수의 완장이 달랐다. 흰색 바탕에 “education for all”이라고 써있었다. 게임마다 문구가 다른가보다, 이것 역시 좋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완장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 그 완장 생각이 다시 났다. 사실 세이브더칠드런 결연이 종료되어서였다. 학교도 철수하고 아이에게 더 이상 교육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자, 이 완장이 다시 생각났다. Captain armbands in Qatar world cup: 놀랍게도 검색을 하자마자 여러 기사가 쏟아졌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부터 필드에서 팀의 주장이 착용하는 완장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12월 13일이다). 최근 몇 년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사실 이런 큰 문제가 아직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나 해결이 안 되고 았어서 ‘반대 움직임’이 ‘거세어’져야 한다는 것이 울화통 터지는 일이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인종차별을 한 관중은 영구히 구장 출입을 금지시킨다. 선수들이 단체로 경기 시작 전 무릎꿇기나 입을 가리는,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그 연장선으로 이번 월드컵에서 많은 선수들이 LGBTQ, 넓게 보아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무지개 색의 하트가 들어간 “1 LOVE”라는 문구가 쓰인 완장을 착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동 국가인 카타르에서 열린다는 점과 정치적 선전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어 피파는 완장에 이 문구 사용을 금지해 대립이 있었다. 정치적인 선전이 아니라며 끝까지 이 문구를 사용하겠다고 주장한 선수도 있고, 일부 선수는 개최국의 문화와 피파의 규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각자의 의견이니까 무엇이 맞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피파에서 완장을 제작해서 제공했다. 예선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보인 “football unites the world”라는 문구가 쓰인 파란 완장이다. 그런데 이게 사이즈 조절도 되지 않고 계속 떨어지거나 흘러내려 선수들을 방해했다. 질나쁜 완장을 만들었다고 말이 많았다. 첫 경기에 쓰인 완장은 질도 문구도 별로지만 두 번째부터는 문구가 그래도 꽤 괜찮았다. 모든 팀에 경기 순서대로 같은 완장이 제공되었는지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우리나라 주장이었던 손흥민 선수 사진을 찾아보니 조별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는 “save the planet”, 세 번째는 ”protect children”(귀국 후 윤석열 대통령에게 준 완장이 이것 같다)이다. 16강 경기에서는 “education for all”이라는 문구가 쓰여있었고, 8강에서 사용된 문구는 “no discrimination”인 것 같다. 모두 다 중요한 말이다. 환경 문제, 아동 문제, 교육 문제. 올해 초 발생해 거의 일 년이 되도록 끝나지 않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해를 거듭해도 정리되지 않는 미얀마 내부의 사태, 북한의 핵 위협, 미국 내 낙태금지법의 부활 등등… 세상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만 가고 있는듯하다. 어떤 기사를 보니 4강, 결승전에서도 각각 다른 문구의 완장을 착용할 거라고 한다. 완장의 문구가 잘 보이는 사진을 찾으려고 검색을 하다보니 해리케인 선수가 유독 많이 나오는데 혹시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1LOVE” 문구의 완장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내서일까? 궁금해진다. 또 조별리그에서 3위로 탈락했지만 독일팀은 월드컵 경기에서도 단체사진 촬영을 할 때 다같이 입을 가리는 포즈를 취했다. 축구선수도 그냥 한 명의 사람이고 어떤 나라의 국민이다. 이 완장 문구 논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고 별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수많은 팬을 가진 인지도와 영향력이 높은 사람으로서 이런 국제적으로 노출되는 대형 행사에서 의견을 드러낸다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그런 영향을 행사할지 말지는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이 개인들의 의견, 선택과스포츠행사 자체, 그 시스템이 보여주는 태도는 또 별개다. 완장 사진을 검색하다보니 챔피언스리그에서 사용된 완장이 보인다. 요리스가 착용한 사진인데 완장 자체가 무지개색으로 되어있다. 다양성을 수용하고 지향한다는 의미의 완장이 챔스리그에서 사용되었다니, 멋지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은 정치적인 문제, 환경 문제 등으로 경기 외에도 이슈가 많다. 일부러 “카타르 불매”를 하려고 경기 중계를 보지 않는 축구 팬도 많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에 속한다. 보도량도 적고 사회적으로 얘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듯하다. 월드컵 자체에서 불거진 큰 이슈들 외에 이런 완장에 쓰인 문구도 큰 파급력이 있다고 믿는다. 나만이 관심가진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선수와 스탭들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경기를 즐기는 동시에 이런 작은 메시지들도 관심가진다면 훨씬 더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 같다.
덧. 서형욱의 뽈리TV가 유튜브 추천에 떠서 보다가 잉글랜드와 이란의 조별예선 경기에서 이란 선수가 뇌진탕 의심으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떻게 된 건가 궁금해서 경기 영상을 찾아서 다시 보다가 경기 시작 직전 잉글랜드 선수들이 모두 무릎을 꿇는 장면을 봤다. 잉글랜드가 카타르의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강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유럽 7개국이 반발을 했지만 결국 1LOVE 완장은 착용 못한 걸로. 8강에 제공된 no discrimination 완장이 이날도 제공되었다고 한다. 이란의 주장은 파란색에 football unites the world가 쓰인 완장을 착용했다. 경기 전날까지 케인은 1LOVE 완장 착용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케인의 사진과 기사가 가장 많았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