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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대해서, 그리고 차를 담는 그릇에 대해서, 그 다음은 그 그릇을 만드는 공방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천천히 온 방 안을 채우는 차(또는 향)의 향처럼 이 책은 내 마음을 천천히 물들이고 가득 채운다.

 

도자기 공방에는 한 번도 가본 기억이 없다. 어린이 체험행사 같은 곳에서 물레로 물컵을 만들어본 적은 있다. 차를 좋아하긴 하지만 차에 대해 아는 건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차나 도예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없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마음, 차를 담기 위한 그릇을 만들어내는 삶에 대해 알게 되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신 동네 할머니가 하셨다는 좋아하다보면 자꾸 하고 싶고 잘 하고 싶고 그런데 그게 힘든 일이니 쉬이 시작하지 말라는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할머니의 말은 '좋아하는 일도 일이 되면 힘들어져'라는 요즘 세대가 일종의 직업윤리 삼는 말과 같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이 꼭 맞지 않다는 걸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직접 말하기도 했듯 차를 정말 좋아하고 물론 힘든 일이지만 차를 좋아해서 하는 일(도예)을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좋아하고 있다. 그, 그리고 토림도예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데 어떤 비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만 좋아하고 만족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주위에 나눠주고자 하는 데서 이러한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또 토림도예의 공예품도 저자의 이런 마음으로부터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히 '내가 재밌는 것을 하는 거야'라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좀 더 고차원적이다.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진심어린 마음이고 애정이다. 공산품도 예술품도 아닌 '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대해, '토림도예'라는 브랜드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그려온 저자의 마음이 참 단단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수많은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언젠가 하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수히 손을 움직이고 허리를 굽히며 똑같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토림도예가 어떤 곳일지 맘대로 상상해본다. 구수한 차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있고, 물을 끓인 따뜻한 공기가 맴도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옆의 작업실에선 시간이 멈춰선 듯 끝없이 물레를 돌리고 흙을 빚고 깎고 구워내는 두 사람이 보인다. 작업실에 난 창 밖으로는 커다란 밤나무가 내다보이고, 그 아래에선 어린이가 깔깔 소리내어 웃고 혼자서도 즐겁게 놀고 있다. 따뜻하다. 어느 누구라도 그 안에 발을 디디면 따뜻한 차 한 잔과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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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년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거치면서 주인공 샘과 이자벨, 또 다른 여성과 샘의 가족이 된 레베카, 아들 이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문장이 간결하고, 샘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빠르게 술술 읽히지만 아쉬운 점은 많았다. 단순히 미국 백인 남성-그것도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의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삶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샘의 삶에는 굴곡이 매우 많다. 아주 힘든 일을 감정적으로도 겪고 사회적으로도 많이 겪지만,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꽤 다양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본인에 대해서는 오히려 꽤나 '좋은 사람'의 이미지만 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점도 좀 아쉬웠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너무 야하고, 이러한 미국 남성의 눈으로 본 '파리 여성'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그려놓고 있는 소설인 것만 같아서 그렇게 새롭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스물 한 살의 샘이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은 그 호텔 옆방 글쓰는 친구의 등장과 함께 영화 <바톤 핑크>를 잠깐 떠올리게도 해서 기대감을 주었지만, 30년(첫 줄에 년도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30년은 확실하다)에 걸친 샘의 삶과 그 삶에서 이자벨이 어떻게 잠깐씩 등장했다가 떠나갔는지와 레베카 및 다른 여자들과의 삶이 주인 소설로 조금은 밋밋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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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느낌의 표지와 '다정한 서술자'라는 말랑말랑한 제목을 보고, 다정함에 대한 읽기 쉬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막상 책을 펼치고 보니 첫 장부터 읽기가 쉽지 않아서 스스로 '내 독해력 무슨일이야'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몇 장이 넘어가고 나자 오히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를 더 듣고 생각하고 싶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말까지 포함하면 총 열 세 편의 글이 실린 이 책은 독자의 마음을 깨우고 이 책(과 이 책을 쓴 올가 토카르추크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책과 저자들과 대화할 자세를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볍고 짧은 글만을 읽어왔고 시선이 얼마나 내 안에만 머물렀는지를 되돌아보게 됐다.

열 두 편의 글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글은 모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엔 마음 속에 하나의 분명한 심상이 남았다. 아마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사람이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중요한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이 어떤 글을 쓰고 무슨 말을 하든 거기에 녹아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심상은 바로 제목에도 쓰인 단어인 '다정함' 이었다. 내가 늘 살아오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 나라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 내 입과 손으로 쓴 이야기가 아닌 번역가를 통해 새로 태어난 말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며 올가 토카르추크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태도인 '다정함'에 대해 얘기한다. 세상은 결국 '관계'로 만들어져있고, 그 안에서 '낯섦'과 '다름'을 잘 인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온 세상이 더 가깝게 연결된 것 같은 요즘, 오히려 '낯섦'이나 '다름'에 대한 인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자기 안으로만 향해있고, 또 그 시선의 깊이나 길이도 얕고 짧다. 결국 다 '나'로밖에 보이지 않고, '나'라는 몸피만 하게 세상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다. 새로움도 다름도, '낯섦'같은 것도 세상엔 없고 너무나 익숙하고 뻔한 '나'만 남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똑같아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접목'과 새로운 탄생, 변형, "기벽"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실제로도 점점 축소될 수 밖에 없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축소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 같다.

강의록에서는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던 작업 과정에 대해서 굉장히 솔직하고 많은 얘기를 한다(<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스포일러가 있었다..! 으앗!).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역시 '낯섦'과 '다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 떠오르기도 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소설가가 글을 쓰면서 주인공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글을 쓸 때 적절한 순간 스윽 나타난다는 얘기를 한다. 또 소설로 썼던 이야기와 인물인데 나중에 현실에서 그와 동일한 이야기나 인물을 마주치는 순간에 대한 경험도 나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 세상 곳곳이 아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만 들여다보고 그 좁은 공간에 침잠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려고 항상 노력하고, 주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정함'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부터 또 새로운 세포가 자라나고 세상이 변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태어나게 된다.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처음 볼 때는 재밌는 상상이네, 어디서부터 이 '(소설가와 주인공 간의)관계'가 시작된 거지? 라는 의문만 가졌다. 그런데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 영화가 다시 떠오르자, 이것이야 말로 올가 토카르추크가 얘기한 '다정함'의 결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는 세상에 지대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세상 어느 한 점에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된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인공 역시 세상에 지대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단순히 순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 주위에 더 관심을 가지고 '다정한' 태도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른다. 요즘 모든 사람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그리고 그 스마트폰으로 휙휙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보는 짧은 영상, 사진, 글을 볼 때 조금만 더 다정한 태도를 가져보는 것은 훨씬 쉬울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눈은 내 안에 여전히 고정된 채로 화면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하는 모든 것에 다정함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럼 그 안에서 불쑥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게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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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思번 국도 2023. 2. 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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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vox.com/even-better/23562374/negotiate-anything-prepare-questions

 

How to negotiate over practically anything

There’s a better way to get the things you want.

www.vox.com

 

띄워놓은 탭이 45개를 넘었다. 작은 핸드폰을 붙들고 누워서 계속 들여다보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자기 위안한다.

결국 컴퓨터 화면에 띄워서 읽은 칼럼. 첫 문단에 등장하는 게 FBI의 납치범 협상 전문가라니... 그런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는 칼럼은 사실 아니었다. 곧바로 일상의 문제들로 넘어가니까.

회사에서 협상, 사실 협상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나에게 꼭 필요한 글이었다.

협상을 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결론이 모두의 결론이 되는 것뿐이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마음도 누그러지고 여유를 조금 찾았다. '내가 원하는 걸 얻는다'라는 말부터가 벌써 다소 방어적이다. 이런 태도보다 언제든지 거절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협상하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동시에 생각해야한다는 게 중요한데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서 다른 쪽을 보는 눈은 쉽게 가리게 되는 것 같다.

나도 이제 곧 얘기하게 될 지 모를 무언가에 대해서

- 상대방이 원하는 것/ 그쪽의 계획이 무엇인지

- 그 사이의 절충안이 될 수 있는 것

     - 상대가 원하는 선택을 한 뒤에 내가 필요한 것들

을 생각하면 된다고 쉽게 결론내렸다.

그리고 내가 현재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고,

몇 달이 지나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일(힘듦)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한다면 걱정할 건 없다.

 

물론 나는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없지만 '거절'하고 협상에서 '떠나기'도 중요하며 이것들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앞쪽에서 강조하고 있다. 작은 부탁을 할 때 우리는 너무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고 걱정하고 지나치게 배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내가 부탁을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착한' 태도를 갖추려고 애쓰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됐다. 그런 지나친 호의와 착함이 오히려 관계를 거짓으로 칠하고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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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로 알게 되었던 작가 메이브 빈치.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해서 짧게 쓰여진 소설이라고 한다(하지만 단편은 아니고 중편 정도 된다).
<그 겨울의 일주일>에서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읽은지 몇 년이 되어 세세하게 감상이 기억나진 않지만, 이번에도 왠지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브 빈치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복잡하지가 않다. 그리고 정말 내 가족이고 내 친구의 모습처럼 특별하지가 않다. 그런 사람들로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게 메이브 빈치의 능력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도 등장하는 건 너무나도 평범한 한 가족이다. 대단히 특별한 갈등이나 대사 없이도 메이브 빈치는 재밌는 이야기를 한 타래 만들어낸다. (너무 멋지다!)
<풀하우스>는 가족에서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잊고 지내는지를 강하게 깨닫게 했다. 집에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즉 엄마에게 당연하다는 듯 맡기고 자신은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는(가정의 free-riders!)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꼭 보고, 깜짝 놀라고 미안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본 전도연, 설경구 주연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전도연의 "하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대사다. 디가 바로 이런 말을 속으로 뱉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결국 갈등은 해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오히려 머릿속에는 새로운 이야기와 질문이 떠올랐다. 애초에 디네 가족이 가졌던 갈등이 '갈등'으로 존재했어야 할 일일까?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어야 하는 이야긴가? 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항상 똑같고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 부분을 메이브 빈치가 잡아낸 것 같다. '이건 당연히 당연하지 않은 것이야, 그런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네. 그럼 이 당연해보이는 일상을 당연하지 않은 소설로 가져가보자.'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자칫 화내고 마음속에 불이 붙어 시커먼 그을음을 남기고 말만한 것인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지 않은 소설의 세상에서 당연한 현실로 다시 발을 디딘다. 이제 당연한 것들을 다행인 것들로 바꾸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생각해보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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